[MJ영상] 광복회, 독립운동가 모교 찾아 독립운동 선양

김원웅 회장, 교육부에 독립운동가 출신학교에 표지석 설치 제안

정민수 기자 | 기사입력 2021/04/01 [21:17]

[MJ영상] 광복회, 독립운동가 모교 찾아 독립운동 선양

김원웅 회장, 교육부에 독립운동가 출신학교에 표지석 설치 제안

정민수 기자 | 입력 : 2021/04/01 [21:17]

김원웅 회장, 교육부에 독립운동가 출신학교에 표지석 설치 제안

 

광복회는 26일 오후, 김원웅 회장과 여수교육지원청 김해룡 교육장, 여수 돌산초등학교 조재익 교장, 전남동부보훈지청 김영진 지청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최연소 독립운동가 주재년 열사의 모교인 여수 돌산초등학교 교정에 기념 식수하고 주재년 열사의 독립운동정신을 기렸다. 

 

 

김 회장은 또한 이날 기념 식수 이후, 주재년 열사의 생가 터에 조성된 주재년열사기념관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고 주 열사의 묘소를 참배했다. 

 

김원웅 회장,“일선학교 출신 독립운동가 선양에 더욱 관심 갖겠다”

 

김원웅 광복회장은 “우리는 이번에 의미 깊은 두 분 독립운동가, 주재년 열사와 윤현진 선생을 기억하는 행사를 가졌다. 이번 행사를 통해 두 분의 행적이 모교에서부터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특히 “14세의 어린나이에도 남다른 역사의식을 가지셨던 주재년 열사가 돌산초등학교를 나오신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당시 어른들도 하기 힘든 바위에 글자를 새겨 일본의 패망을 예견했을 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고초를 당할 것을 염려하여 당당히 자신이 했다는 것을 밝힌 모습은 참으로 의연하며, 후학들에게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밝혔다.

 

김 회장은 그러나 “주재년 열사에 대한 홍보가 미흡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며, “주 열사의 선양사업에 대해 관계기관과 논의함은 물론, 이번 기회를 계기로 전국의 일선학교에 출신 독립운동가 표지석 설치를  제안한다”고 말했다. 

 

‘일본은 패망한다 ’ 등 네 구절 새겨 민족의식 일깨운 14세의 주재년 열사

 

주재년 열사(1929.1.28~1945.11.14,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는 1943년 3월 여수군 돌산면 공립국민학교 제6학년을 졸업하고 집안일을 돕고 있었다. 그는 국민학교 재학시절부터 항일의식이 투철했다. 1942년 음력 12월 초순경, 그의 형 재연(在淵)의 한센병을 치료하기 위해 와 있던 일본인으로부터 '대동아전쟁이 장기화되면 일본이 패망하고, 한국은 미국 등의 힘을 빌려 독립해야 한다'라는 말을 듣고, 1943년 9월 초순경, 여수에서 조국독립의 실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말을 유포했다. 

 

그리고 동년 9월 23, 24일경, 나무하러 가는 도중 돌산면 율림리로 가는 도로 민가 목화밭 담장에 '조선과 일본은 다른 나라(朝鮮日本別國)', '일본은 패망한다(日本鹿島敗亡)', '조선만세(朝鮮萬歲)', '조선의 빛(朝鮮之光)'이라는 글자를 새겼다가 사흘 만에 여수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이때 일제는 경비정 7~8척과 경찰 100여 명을 동원해 경적을 울리며 온 마을을 수색했으나 범인을 잡지 못하였다. 이에 주민들을 모아놓고 마을에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하자, 주재년 열사는 자수했다. 

 

주재년 열사는 1944년 1월 21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조선임시보안령 위반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4년을 받아 풀려났으나, 4개월간의 복역 도중 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이듬해에 순국했다. 주 열사의 항일운동 사실은 거의 8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항간에 구전되어 오다가 2006년 열사의 조카에 의해 관련 자료가 발굴되어 그해 8월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윤현진 선생 모교 부산 구포초등학교에 동상 제막식도 가져

 

광복회는 이와 함께 27일 오전, 독립운동가 윤현진 선생의 모교인 부산 구포초등학교를 방문해 김원웅 회장과 구포초등학교 김선자 교장, 김민선 학부모 회장 등이 모인 가운데 윤현진 선생 동상 제막식에 이어, 기념 식수을 했다. 

 

윤현진 선생(1892.9.20~ 1921.9.16,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은 경상남도 양산 출신으로 1906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명치대학교 법과에 입학 법률공부를 하였으며, 재학 중 조선유학생학우회를 조직하고 총무로 선임되어 항일투쟁을 했다. 

 

졸업 후 귀국해 1909년에는 백산 안희제 등과 비밀결사 대동청년당을 조직해 활동하는 한편, 양산에 의춘학원을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했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는 고향에서 만세시위에 적극 가담 활동하고, 압록강을 건너 단신으로 상해로 망명했다. 선생은 그곳에 모인 독립지사 수십 명과 교류하기 시작했으며, 이시영·이동녕·김구·노백린·여운형·신익희 등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했다.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고, 이어 초대 재무차장에 선임돼 임정의 재정문제를 해결하는 데 최대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특히 백산상회자금 30만원을 임시정부 군자금으로 헌납함으로써 재정압박을 다소 완화시켰다. 

 

이어 임시정부 상임위원회에서 재무위원장에, 제2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다시 내무위원으로 선출됐다. 동년 5월에는 구급의연금모집위원이 되어 어려운 임시정부의 재정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했다. 

 

 

1920년에는 독립신문사를 주식회사로 확장하고 안창호와 같이 자금모금의 발기인이 되어 홍보활동을 전개했으며, 1921년 5월에는 국민대표회의기성회를 조직해 활동했으며, 같은 해 중한국민호조사를 결성, 중국과 같이 공동의 적인 일본을 섬멸할 계획을 수립하고 실천할 것을 결의했다. 구국의 일념에서 건강을 돌보지 않고 구국투쟁에 헌신하던 그는 상해에서 30세로 요절했다. 

 

당시 일본 아사히신문에서도 "형극의 배일 수완가 윤현진의 사(死)"라는 제목 하에 그의 사망은 임시정부의 패망이라고까지 논평할 만큼 그의 위치는 뚜렷했다. 그의 장례는 임정요인들의 애도 속에 국장으로 치러져 상해의 정안사 외인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95년 유해가 봉환되어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문화저널21 정민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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