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 꿈 너머 푸른 꿈을 찾아…문서진 화백의 회화 세계

서승석 | 기사입력 2021/05/14 [08:15]

둥근 꿈 너머 푸른 꿈을 찾아…문서진 화백의 회화 세계

서승석 | 입력 : 2021/05/14 [08:15]

문서진 화백의 회화는 둥근 꿈 너머 푸른 꿈을 찾아서 시적 몽상의 세계로 향하고 있다. 불과 흙의 조화로 빚어진 달항아리는 그녀의 손끝에서 가이없는 몽상의 시학을 길어낸다. 조선백자를 품었던 불가마가 그러하듯, 고독한 명상의 시간을 가로지른 자취인 문서진의 달항아리는 온갖 형형색색의 다채로운 이미지들을 쏟아낸다. 그녀의 달항아리는 자궁이다. 탁월한 시적 상상력으로 생명의 불꽃을 피워 올리고, 자신을 탄생시킨 불의 정기를 되살아나게 하는… 자신의 재속에서 매일 새롭게 소생하는 불새Phénix처럼, 그녀의 달항아리는 생명을 품었다가 생명을 비워내는 작업을 항구적으로 지속한다. 하여 그 달항아리는 외적 차가움과 내적 뜨거움을 동시에 은닉하고 있다. 화염의 애무를 받고 불의 제국에서 태어난 새하얀 피조물들이, 문서진의 화폭에서 다시 인간의 원초적인 사랑의 흔적을 상기시키며 보석처럼 아름답게 피어난다.  

 

▲ 도판1∼2)왼쪽부터 각각 Time & Culture. 97×162cm Mixed material 2000


“꿈은 경험보다 훨씬 더 강하다.”('불의 정신분석', 이학사, 48쪽)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명언을 몽상적 꿈의 세계를 펼쳐 나아가는 문서진의 회화가 명백히 입증하고 있다.

 

달항아리

 

1300도 이상의 열기를 견디어 내고 탄생한 도자기는 오래전부터 동서고금의 시인과 화가의 사랑을 받아온 소재이다. 1956년에 프랑스로 건너가 서양화에 동양적 요소를 접목시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해온 김환기는 1957년에 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며, '항아리'·'항아리를 든 여인'·'여섯 개의 흰 항아리의 구도' 등을 선보이며 단순화된 선과 형태로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프랑스인들에게 각인시켰다, 최근에 인기를 끌고 있는 팝아트 작가 김중식은 도자기 그림에 명화에서 차용한 인물들이나 명사들, 석가여래상 등을 중첩시켜 특수한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새로운 시도를 제시하며 각광을 받고 있다.

 

한편, 서정주는 '기도1'에서 자신의 심상을 항아리에 이입시켜 비움과 채움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저는 시방 꼭 텡 비인 항아리 같기도 하고

또 텡 비인 들녘 같기도 하옵니다.

주여 한동안 더 모진 광풍을 제 안에 주시든지

날으는 몇 마리의 나비를 주시던지,

반쯤 물이 담긴 도자기와 같이 하시든지

뜻대로 하옵소서. 

시방 제 속은 꼭 많은 꽃과 향기들이 

담겼다가 비워진 항아리와 같습니다

- 서정주 <기도1> 전문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가장 세밀하고 정교하게 표현한 회화작품으로는 스페인의 궁정화가였던 디에고 벨라스케Diego Velazquez의 '세비야의 물장수Le Porteur d’eau de Séville'(1618년-1622년)를 꼽을 수 있다. 이는 바로크적 스펙터클을 가장 잘 돋보이게 하는 요소인 빛을 최대한 활용해서, 극적인 명암대비 효과로 사실적 묘사에 힘을 실리는 이탈리아의 카라바지오Caravaggio 화풍의 영향을 받은 벨라스케스가 즐겨 그리던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기법으로 그려진 작품이다. 그의 초기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일상의 풍경을 묘사함에 있어서 식기와 같은 정물 요소를 함께 그리는 그림’에 속한다. 스페인에는 보데곤bodegon이라 불리는 장르가 있는데 스페인 정물화를 일컫는다. 

 

'세비야의 물장수'에는 물을 파는 노인과 젊은이, 그리고 뒤에서 물을 마시는 사람 등 세 인물이 등장한다. 그런데 눈길을 끄는 것은 단연,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탁월한 질감과 색감이 돋보이는 전면과 중면에 위치한 물항아리들과, 노인과 젊은이가 들고 있는 투명한 유리잔이다. 앞부분에 그려진 유약을 바르지 않은 질박한 물항아리는 화면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아 후면의 인물들이 무색할 정도로 두드러져 보인다. 더운 날씨에 안에 차가운 물이 담긴 듯, 무광택의 항아리에는 겉이 촉촉이 젖어 물방울이 맺혀있고 찌르르 물방울이 흘러내리기도 한다. 반면 중간에 놓여 있는 조금 더 요염한 형태의 작은 항아리는 유약을 발라 반짝반짝 빛나고, 주둥이와 바닥에 물이 약간 고여 있다. 특히 항아리의 묘사에 있어서 괄목할만한 것은, 도자기 전문용어로 “모미지가 핀다”는 일본어가 있는데(‘단풍이 핀다’는 뜻으로, 도자기를 굽는 동안 화염의 혓바닥이 핥고 간 자국처럼 도자기에 생긴 주황색의 불그스름한 무늬), 이 불꽃 무늬를 너무나 사실적으로 정밀하게 표현한 점이다. 전혀 고급스럽지도 않고 질박한 이 항아리들에서 ‘불의 예술의 존엄성’마저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문서진은 이런 예술적 도자기 사랑의 맥락에서 또 한발 앞서 나아가고자, 극사실화에서부터 초현실주의 기법까지 꾸준히 연마해가며 창의적인 표현을 구사하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끊임없이 모색하고 있다. 그녀는 “나는 ‘달 항아리’와 자연의 조합이라는 익숙한 사물들의 조합을 통해서 낯선 발언을 하고 싶었다. 낯선 발언이란 인간과 자연과의 화해 혹은 조화이다.”라고 창작 의도를 밝히며, “빛의 공법, 우툴두툴 기법, 자연광과 인공광의 융화, 수 만개의 절묘한 클릭 표현, 처음에 아크릴 재료를 사용하여 색감을 형성한 후 수차에 걸쳐 유화물감으로 마티에를 형성하기” 등에 매진하며 독창성을 인정받으려 노력하고 있다. 

 

▲ 도판3∼4) 왼쪽부터 각각 Zero Mass. 72.7×60.6cm Mixed media 2000


초현실주의 미학

 

한국미의 원형인 달항아리의 미학은 서구의 초현실주의 출현 이전에 이미 초현실적이었다. 기계에서 뽑아낸 것이 아니라, 사람이 반쪽에 다시 반쪽을 붙여 만든 비대칭의 달항아리에는 도공의 숨소리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는 한국적 미학의 진수를 보여준다.

 

 문서진은 사실주의 그림으로 화단에 입문한다. 산골에 눈이 내린 겨울풍경을 담은 '고개 너머 어머니의 품'(1990)은 차가운 겨울햇살이 건초더미 속에서 투명하게 빛나는 서정적 작품으로, 그녀에게 대한민국미술대전에 입상하는 영광을 안겨주었다. 1994년부터 그녀는 항아리와 매병, 문병 등을 소재로 다루기 시작한다. 이어서 '정적' 시리즈에서 시간의 흔적을 포착하려 노력한다. 

 

2000년대부터는 양립할 수 없는 현실과 미래를 공존시키려는 시도로 'Zero Mass' 시리즈에 몰입한다. 'Time & Culture', 'Zero Mass' 시리즈에서는 파도치는 바다에 무중력 상태로 둥둥 떠 있는 도자기나 사과 등을 그려낸다. 특히 2000년대에 발표한 '숨결' 시리즈와 'Time & Space' 시리즈에서는 우리 민족의 ‘얼과 숨결’을 되살리고자 도기와 다기의 일루전을 화면에 활용한다. 예술성과 사회성을 동시에 갖춘 작업인 'Intimate but Odd, 익숙하지만 낯선' 시리즈에서는 바다와 도시풍경 위에 항아리와 민속품이 실루엣으로 처리된다.  그 이후 선보인 'Mind Vessel'(2018-2019) 시리즈에서는 도자기의 질감과 색감을 공들여서 사실적으로 표현하며 도자기 작가로서의 자리 매김을 다져간다. 2020년, 그녀는 “유례가 없는 독창성으로 ‘회화(평면)에 의한 입체(달항아리)적 표현’이란 독보적 경지를 개척하였다”는 평을 들으며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가 주최하는 '올해의 최우수예술가상'을 수상하게 된다.

 

문서진의 회화 세계를 살펴보면 초현실주의의 정신, 기법과 미학을 이어받은 흔적이 드러난다. 특히 그녀의 작품 <Intimate but Odd> 시리즈는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의 작품들을 상기시킨다. “자유로운 사고의 힘에 의하여 신비를 야기 시키는 것”이 회화라고 주장하였던 그는 대상을 변형, 왜곡시키는 데포르마시옹déformation보다는 데페이즈망데dépaysement 효과에 더 역점을 두었다. 평소에 익숙했던 사물들의 위치를 전환시켜 엉뚱한 다른 요소들과 결합시켜서 기존의 재현 체계를 거부하였다. 또한 말과 사물 사이의 엉뚱한 조합(예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을 시도하여 말과 사물, 언어와 사고 사이의 의미관계를 전복시키려 하였다. 그는 '규방의 철학Le Philosphie dans le boudoir', '붉은 모델Le Modèle rouge', '능욕Le viol' 등에서 드레스의 가슴 부분이 젖가슴으로 튀어나오고, 구두의 앞부분이 발가락들로 변형되고, 얼굴이 여자의 나신으로 변모하는 등의 이미지를 선보여 낯선 심리적 충격을 관람객들에게 가하였고, 특히 문을 사용하여 현실과 미지의 세계,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 두 차원의 세계를 결합하는 방법을 즐겨 사용하였다.(신현숙, '초현실주의', 동아출판사, 234-238쪽 참조) 

 

20세기 전반에 걸쳐 세계 예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예술운동은 바로 초현실주의이다. 다다운동의 잿더미 위에서, 1924년 파리에서 새로 결성된 시인과 화가들이 “삶을 바꾸고 세계를 변혁시키겠다”는 혁명적 선언을 공표하며 초현실주의를 출범시킨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삶과 세계에 도전적 자세로 맞서며, 이성과 기독교 문명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단호한 결단으로 뭉쳐서 기존의 종교적·윤리적·미학적으로 잘 정돈된 합리주의적 현실의 공간에 회의를 느끼며 그 시공의 체계 속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들은 존재의 근원을 찾으려 애쓰며, 생명의 약동을 느끼고자 하였고, 모순과 대립이 융합되는 지점, 즉 초현실적 영역에 다다르고자 하였다. 초현실주의 정신은 바로 “‘자유·사랑·시’라는 삼위일체의 혼합물이며, 인간 본연의 모습을 추구하고, 세계를 생명이 약동하는 열린 공간으로 바꾸려는 것”이다.(상기 인용 책, 5쪽) 그들은 또한 광기를 일종의 ‘확장된 상상력’으로 간주하며, 우리의 인식을 좀 더 넓힐 수 있다고 여겼다. 상식 밖의 세계를 제시하는 광인은 일상의 시간과 공간의 환각, 혹은 환상의 시간과 공간을 중첩시키며, 두 개의 시간과 공간을 공유한다고 보았다. 편집병은 현실과 상상을 종합하는 성향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초현실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살바도르 달리는 ‘비평·편집병적 방법La méthode paranïaque-critique’을 통하여 꿈, 환상, 무의식 등 비합리적인 세계를 구체적으로 실현시키려 하였다. ‘비평·편집병적 방법’은 우리의 강박관념 혹은 정신착란을 분석하고, 체계화한 다음, 연상망을 이용하여 해석하고 비판하여 객관화시키는 방법이다. 그의 '아파트로 사용되는 메 웨스트의 얼굴Visage de Mae West pouvant servir d’appartement', '기용 텔Guillaume Tel', '수음Le grand masturbateur' 등의 여러 작품에서 우리는 무한히 확장된 무의식의 상상력과 현란한 환타지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 도판5∼6) 왼쪽부터 각각 Intimate but Odd. 90.9×72.7cm Mixed media 2014 

 

시적 몽상과 회화적 몽상

 

문서진의 회화적 성과는 시적 상상력과 철학적 사유에 기인한다.  무중력 상태로 파도치는 바다 위에 떠서 물결의 애무에 몸을 맡기는 사과와 토기, 아랫부분이 열려 푸른 바다와 만나는 달항아리와 함께, 문서진의 그림에 빠져서 우리는 깊은 시간의 늪 속에 침잠하며 아득한 원초적 시원을 찾아 아련한 몽상에 빠져든다.

 

 최초로 『회화론』Della pittura(기파랑)을 발표한 르네상스 인문학자 레온 알베르티Leon Alberti는 회화의 고유한 능력에 대하여 언급하며, 회화란 세계에 “아름다움을 더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즉 자연과 인간을 포함한 세계의 모습을 “본래 상태보다 더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는 힘이 바로 회화적 능력이다. 알베르티는 회화 예찬론을 펼치며, 그동안 정신노동이 아닌 육체노동의 산물이라 간주되어 뿌리 깊이 천시되어온 회화와 화가의 위상을 높이는 일에 기여하였다. 그는 “회화를 명예롭고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회화 예술은 자유로운 지성의 소유자들이 추구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여 그는 화가가 좋은 그림을 그리려면 시인과 가까이 지내야 한다고 충고한다. 이전에는 시인만이 왕족이나 귀족이나 성직자와 함께 하던 자리에, 르네상스 이후에 드디어 화가도 합석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그는 회화가 자연과 인간의 재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화가의 상상력에 의하여 무한대로 펼쳐 나아갈 수 있는 현대미술의 길을 예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미술은 단순히 힘이나 쓰는 장인의 일이 아니라 정신을 고양시켜야 얻어지는 창의적 작업인 것이다. 테크닉 이전에 고양된 정신이 있어야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 르네상스 대가들을 키운 메디치가의 사람들이 화가들을 어린 시절부터 공방에서 스토아철학을 비롯한 철학과 인문학을 집중적으로 교육시킨 이유이다.

 

▲ 도판7∼8)왼쪽부터 각각 Mind Vessel. 53.0×45.5cm Mixed media 2018


도자기의 빙렬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손에 피가 맺히도록 처절한 도전을 하고 있는 문서진이 앞으로 풍부한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하고, 철학적 사유를 계속하며 더욱 정진하여 벨라스케스의 물항아리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운 작품을 실현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바슐라르에 의하면 불은 순수의 상징이다. 불은 모든 것을 정화한다. 따라서 불의 시련을 받고 태어난 도자기는 순수화되었다. 완전한 구가 아닌 달항아리를 “‘우주’ 혹은 ‘행성’이라고 여기며, 이 하나의 작은 우주에 세상을 담아보기로” 작정하고, 2010년부터 달항아리 창작에 매진해오고 있는 문서진의 회화세계가 더욱 발전하기를 기원하며 필자의 졸시 <백자 항아리>로 글을 마친다.

 

▲ 도판9) Mind Vessel. 90.9×72.7cm Mixed media 2020

 

달이 떴어요

 

불가마 속에서 불을 먹고

텅텅 속을 비우고

겨우 얻은 

사랑 하나

 

오랫동안 밤이었던 나는

큰 입을 갖고도

말이 없는

달이 되고 싶어요

 

혼자서도

외롭지 않은

서승석 '백자 항아리' 전문

 

2021.  5.  서승석(미술평론가⋅불문학박사)   

 

▲ 서승석 미술평론가 ©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평론가(문학·미술)이자 시인 서승석 불문학 박사는 1995년 시집 ‘자작나무’ 출간으로 시작 활동을 시작해 2013년 ‘유심’ 평론부문에 등단했다. 이화여자대학교 문리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파리 4-소르본대학교에서 비교문학 석사,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덕성여자대학교, 수원대학교 겸임교수 및 서울대학교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저서로는 시집 ‘자작나무’, ‘흔들림에 대하여’, ‘사람 사랑’, ‘그대 부재의 현기증’과 번역서로 파블로 피카소 ’시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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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희망봉 2021/05/16 [08:15] 수정 | 삭제
  • 문학적 감각이 시대를 선도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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