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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 첫 구절이다. 사람은 누구나 상실을 겪는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지나간 시간을 잃고, 젊음과 힘, 한때의 꿈까지도 잃는다. 그래서 상실은 낯설지 않다. 그러나 낯설지 않다고 해서 결코 덜 아픈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익숙함 속의 상실이야말로 우리를 더욱 깊은 침묵으로 이끈다.
우리는 흔히 슬픔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괜찮아질 거야”,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거야”라는 말로, 눈물의 시간을 덮어두려 한다. 하지만 상실은 잊는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덮어둔 마음의 밑바닥에서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또 다른 형태의 고통으로 되돌아온다.
상실, 슬픔, 눈물, 아픔, 고통의 감각에 머물러 본 사람만이 안다. 그 머묾의 시간이 얼마나 느리고, 얼마나 버거운지를. 그러나 바로 그 머묾 속에서 인간은 다시 살아간다. 그때의 눈물은 단순한 비탄이 아니라, 존재가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통로다.
죽음학에서는 이 과정을 ‘감응의 윤리’라 부른다. 감응이란 슬픔에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슬픔이 우리 안에서 움직이고 흐르는 결을 느끼는 것이다. 타인의 죽음 앞에서, 나의 상실 앞에서, 우리는 그 감응의 결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살아 있는지를 다시 확인한다. 눈물은 흘러내리지만, 마음은 그 자리에 머문다. 그 머묾이 바로 자기 됨의 시작이다.
고통의 시간은 인간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통은 우리 존재의 가장 오래된 언어다. 프로이트가 말했듯, 억압된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다른 형태로 돌아온다. 우리가 고통을 피할수록, 고통은 더 정교한 언어로 우리를 찾아온다. 그 언어의 형태는 병일 수도, 침묵일 수도, 혹은 부사구처럼 “그냥… 괜찮아요”라는 짧은 숨결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복은 ‘극복’이 아니라, 그 언어의 리듬을 천천히 듣는 일에서 시작된다.
상실은 우리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오히려 상실은 우리를 재구성한다. 눈물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삶의 조각들, 그것이 ‘그의 시간’, ‘그의 공간’에서만 펼쳐질 수 있는 고유한 서사다. 누군가의 슬픔은 결코 타인이 대신할 수 없다. 각자의 눈물은 각자의 존재론을 품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슬픔을 통해, 고통을 통해,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존재의 고유함’을 존중하게 된다.
“슬픔이 끝난 자리에서 새로운 희망이 시작된다”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 호히려 희망은 슬픔의 한가운데서 싹튼다. 슬픔을 견디는 그 마음의 자세 속에 이미 변화의 씨앗이 숨어 있다. 그 씨앗은 무너짐의 틈에서, 상실의 공백 속에서 서서히 자란다. 그것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그러나 가장 깊고 조용하게 피어난다.
우리가 흘린 눈물의 깊이만큼, 우리는 세상을 더 부드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하여 비로소 알게 된다. “상실, 슬픔, 눈물, 아픔, 고통의 감각에 머물 때, 비로소 지향되는 마음들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그것이 바로, 삶이 우리에게 남겨준 마지막 윤리이자 가장 진실한 변화의 시작이다.
임병식 철학박사.의학박사 한신대 휴먼케어융합대학원 죽음학 교수 한국싸나톨로지협회 이사장 <저작권자 ⓒ 문화저널21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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