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명활성, 속내를 드러내다

이영경기자 | 기사입력 2013/12/03 [09:07]

경주 명활성, 속내를 드러내다

이영경기자 | 입력 : 2013/12/03 [09:07]


【문화저널21 = 이영경 기자】매장문화재 조사기관인 계림문화재연구원은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발굴조사(2013.6.25.~11.30.)를 한 경주 명활성(慶州 明活城, 사적 제47호) 북문지 발굴유적에 관한 현장설명회를 오는 3일 오후 2시 발굴조사 현장에서 개최한다.
 
명활성의 북문지(北門址)로 추정되는 곳에서 문지(門址), 치성(雉城, 성곽 일부를 돌출시켜 놓은 것), 문지로 진입하기 위한 석축 구조물 등이 최초로 조사됐으며, 반원형(半圓形)의 치성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충청북도의 보은 삼년산성(報恩 三年山城, 사적 제235호)과 경상북도의 문경 고모산성(聞慶 姑母山城)에서 확인된 바 있다.
 
북문지의 양쪽 측벽에서는 다량의 평기와와 철판(鐵板), 철정(鐵釘, 쇠못) 등 당시 나무문에 사용되었던 철제유물이 정형성 있게 출토됐고, 특히 문지의 동서 끝단에서는 확쇠(나무 기둥을 바닥과 고정시키는 철기)가 출토돼 그 너비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를 확보할 수 있게 됐다.
 
문화재청은 “이번 조사 성과는 명활성 문지의 실체와 반원형(半圓形)의 치성이 신라 외곽지역 이외에 신라왕경인 경주에서 최초 확인된 점에서 학술 가치가 매우 크며, 이는 앞으로 경주 명활성 정비에 있어 중요한 기초 자료를 확보한 것”이라고 전했다.
 
아울러 경주 명활성은 삼국사기에 실성왕(實聖王) 4년(405년)에 왜구를 물리쳤다는 기록이 처음 등장하며,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18년(475년)부터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10년(488년)에는 임시 궁궐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또 선덕왕(善德王) 16년(647년)에는 비담과 염종의 반란군들이 반역을 도모한 근거지로 기록되어 있어 신라왕경(新羅王京)에서 지리적, 역사적으로 중요한 산성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lyk@mhj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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