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나의 여신이 알려준 권력의 역학, 연극 ‘비너스 인 퍼’

‘마조히즘’ 탄생시킨 자허마조흐의 원작 소설, 2인극으로 무대에

이영경 기자 | 기사입력 2017/08/03 [16:00]

[리뷰] 나의 여신이 알려준 권력의 역학, 연극 ‘비너스 인 퍼’

‘마조히즘’ 탄생시킨 자허마조흐의 원작 소설, 2인극으로 무대에

이영경 기자 | 입력 : 2017/08/03 [16:00]

각색가·연출가인 남자에게 ‘떨어질 수 없는 두 사람의 이야기’이자 ‘서로의 마음에 수갑이 채워지는 이야기’ 혹은 인간과 인간의 화학반응을 다룬 이 작품을 두고, 오디션을 보게 해달라며 조르던 여자는 ‘포르노인 줄 알았다’고 하더니 ‘여성혐오 교양서’라면서 맹렬히 비난한다. 교양 있는 남자주인공을 ‘머리만 굴리는 사람’이라 단숨에 정의하고, 삶에서 경험할 수 없는 열정을 관객들에게 알려주고자 연극을 하는 연출가에게 ‘그 열정을 경험하려면 삶 속으로 뛰어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반문한다. 여전히 알 수 없는 열정과 변태성향 사이. 작가와 배우가 서로를 탐하고 밀쳐내면서 위험한 리듬을 타는 동안에도, 그러거나 말거나 비너스는 여전히 우아하고 육감적이다. 만세, 아프로디테!

 

 

연극은 오스트리아 작가이자 언론인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L.R.von Sacher-Masoch)의 동명 소설을 데이비드 아이브스(David Ives)가 각색한 것이다. 원작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  베첼리오 티치아노의 ‘거울을 보는 비너스’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 소설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노래에 영감을 주었고, 연극은 후에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자허마조흐의 소설의 영어판 제목은 ‘Venus in Furs’이고, 아이브스의 희곡은 ‘Venusin Fur’로 ‘S’의 미묘한 차이가 있으며 시대와 상황이 다르다. 이 소설의 영향으로 작가 이름을 빌려 ‘마조히즘’이라는 단어가 탄생하기도 했다.

 

원작은 액자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줄거리는 이렇다. 돌로 된 비너스상을 흠모하던 귀족 청년 제베린 폰 쿠지엠스키는 위층에 머물고 있는 미망인 반다 폰 두나예프라는 여인에게 반해 청혼한다. 자유분방한 여성 반다가 이를 거절하자 차라리 노예가 되겠다는 쿠지엠스키의 구애는 계속된다. 반다는 이 묘한 관계 속 쾌감을 느끼게 되고 이들은 노예와 주인의 위치를 상정하는 계약서를 작성한다. 아이브스 희곡에서의 배경은 현대다. ‘비너스 인 퍼’에 기반 한 연극을 준비 중인 연출가 토마스는 여주인공을 찾기 위해 오디션을 진행하지만 마음에 드는 배우를 찾지 못해 실망한다. 약혼자와 통화하며 이를 불평하는 중에 들이닥친 벤다는 오디션을 보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 실랑이 끝에 둘은 대본을 읽기 시작하고, 소설 속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토마스는 벤다에게 서서히 압도당한다.

 

‘마조히즘’이라는 단어를 탄생시켰으니 자극적인 장면이 많을 거라 생각되지만 고작 채찍만 몇 번 등장할 뿐, 작품은 행위보다는 인간 내면에 잠재된 욕망과 그것이 충돌할 때 발생하는 권력의 역학을 이야기한다. 19세기를 배경으로 했을 때 상상할 수 있는 남성과 여성의 수직관계, 오디션장에서 연출과 배우가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외형적 권력관계는 아름다운 여신 비너스의 힘을 빌려 전복된다. 소설 속 벤다는 쿠지엠스키에게 절대힘을 행사하고, 배역을 따내고자 걸어 들어온 연극 속 벤다 역시 극작가 토마스와의 관계에서 점차 주도권을 쥐게 된다. 감추어져 있던 욕망에 대한 담론은 설득력 있는 전개와 배우들의 유연한 연기로 구체화된다. 가학적이고 노골적인 주제임에도 부담스럽지 않고 ‘너는 누군가’에서 ‘나는 누구인가’로 이르는 흐름 역시 자연스럽다.

 

소설이 연극으로 각색되고, 그것이 우리말로 번역되면서 위트가 더해졌다. 영리한 유머는 언제나 옳다. 특히 원작에 등장하는 비너스 관련 장면을 삽입하기 위해 작가와 배우는 즉흥적으로 상황을 연출하는데, 이 장면이 은근하게 도발적이면서도 말할 수 없이 귀엽다. 밍크만 걸친 비너스라니, 상상만으로도 황홀한 이 여신은 매일 벗은 몸으로 날아다니느라 추위에 떨지만 벗고 있지 않으면 아무도 자신이 비너스라는 것을 모를 테니 도리가 없다. 그냥 봐도 비쌀 밍크는 무려 ‘메이드 인 헤븐’이다. 거부할 수 없는 여신과 대면하게 된 문명사회의 인간은 그녀의 유혹을 거역해야할 의무가 있지만 그건 원래 쉬운 게 아니다. 양쪽으로 관객석이 배치된 무대 위에서 숨을 곳 없는 배우들이 펼치는 이 게임은 분명하면서도 절제된 조명과 음악의 힘을 통해 감각적으로 완성됐다. 김민정 연출/이도엽·지현준·방진의·이경미 출연/2017.07.25~08.27/두산아트센터 Space111

 

문화저널21 이영경 기자 lyk@mhj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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