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꾼보다 향기있는 사람이고 싶다"

사람냄새 나는 국회의원 정화원

김홍래기자 | 기사입력 2008/02/26 [14:04]

"정치꾼보다 향기있는 사람이고 싶다"

사람냄새 나는 국회의원 정화원

김홍래기자 | 입력 : 2008/02/26 [14:04]
사람냄새 나는 국회의원 정화원
정치꾼이기 보다 향기있는 사람이고 싶다. 

 
↑정화원 의원 ⓒ최재원기자


 올 7월이면 환갑인 국회의원 정화원. tv 화면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그는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다. 스스로를 일컬어 ‘눈 감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그는 시력을 잃고 더욱 예리해진 손 감각으로 배운 침으로 아픈 사람을 고치는 자칭 ‘침쟁이’였다. 한 때 인근 고을에까지 명성을 떨칠 만큼 침 잘 놓기로 소문난 인술가 정화원. 그가 뒤늦게 정치를 하겠다고 나선 데에는 다 그만한 사연이 있었다.
 
장애인 대표로 국회에 들어온 그는 한마디로 장애인들의 희망이요 기대였다. 그에게 거는 장애인들의 기대에 어긋날까 4년 임기 동안 내내 어깨가 무거웠다. 하지만 그 짐은 결코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기본권마저 새로 찾아나서야 하는 장애인들에게 더 절실한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잘 하는 일인지 지난 4년간 단 한시도 그런 사실들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4년 동안 그가 해낸 많은 일들은 이제 장애인들의 새로운 권리 찾기를 위한 초석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막상 4년 임기를 끝낼 시점에서 그는 여러 모로 아쉽다. 장애인들을 위해 아직도 해야 할 일들이 많은데, 여전히 어렵지만 풀어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은데, 함께 가야 할 길에 앞장서서 할 수 있는 일들은 많은데 벌써 임기는 끝나고 있다. 그래선지 요즘 장애인계는 정 의원이 비례대표를 한 번 더 할 수 있도록 공직자법 개정을 촉구하는 집회를 연일 열고 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 장애인들을 위해 훨씬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당헌 당규를 고쳐야 하기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 같다. 한나라당에서 비례대표를 한 번 더 주면 해볼 것도 같은데 그게 되겠느냐고.
 
정치꾼이기보다는 사람 냄새가 풀풀 나는 한 인간이고 싶었다는 정화원 의원. 아마 조만간 그의 다음 정치역정이 결정될 것이다. 계속 정치를 하든, 장애인 운동을 하든 그는 여전히 한 잔 술에 인생을 녹여내며 이태백을 논할 것이다. 혹은 더러 올곧지 못한 일들을 보고 호통치고, 더러 이 쪽 저 쪽을 아우르며 함께 울고 웃는, 또 다른 치열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시력을 잃고 겪었던 절망만큼이나 보이지 않는 세상을 통해 깊은 마음의 눈을 갖게 된 정화원 의원. 그의 마음의 눈, 여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항상 보이는 여유 넘치는 넉넉함과 남을 배려하는 풍성함은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 호탕하고 그릇이 큰, 그러나 여린 마음을 짚어줄 줄도 아는 섬세한 사람 정화원 의원을 만나 그의 옛 이야기, 정치 밖의 사람 사는 이야기를 담백하게 나누었다.
 
ⓒ최재원기자
정화원 의원의 ‘마이웨이’는 무엇인지?

그의 모바일폰 컬러링은 섹소폰 연주 ‘마이웨이’다. 몇 년 째 이 곡을 컬러링으로 사용하고 있다. 오랜만에 전화한 사람들은 그에게 아직도 ‘마이웨이’냐며 웃는다. 그는 대답한다. 영원히 마이웨이라고.
 
그는 ‘마이웨이’에 대해 상당한 부담감을 가지고 산다. 시각장애인으로서 중증장애인으로서 당당하게 가야하는 길, 그 길을 앞장서 가야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뒤에서 따라오는 많은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하고 올바른 길로 잘 인도해야 했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열심히 살았고 후회 없는 ‘마이웨이’를 닦아왔다고 생각한다. 국회의원이 되어 나름대로 장애인들의 위상과 자존심을 세워주었다고 생각하지만 혹여 그렇지 못한 일이 생기면 어쩌나 내내 부담감을 가지고 산다. 하지만 그에게 앞으로도 여전히 ‘마이웨이’는 있다고.
 
현재 장애인계에서 굉장한 역할을 해내는 중요한 분으로 인정받고 있는데, 지난 4년을 회고해 본다면.
장애인 운동을 30여년 하면서 국회에 들어오리라는 생각은 안했다. 그저 열심히 하다보니 여기까지 왔을 뿐이다.
 
그동안 장애인 정책은 시혜적이거나 동정적인 면, 혹은 탁상공론에만 치우친 면이 있다. 그래서 장애인 운동에 뛰어들었고 현 한나라당 권철현 의원과 통합민주당의 윤은호 의원과 함께 부산에서 시민운동도 했다. 그리고 부산 시의원에 도전했고, 장애인에게 필요한 법을 만들어봐야겠다고 생각해 17대 국회의원에도 도전했다.
 
한나라당에 진심으로 장애인 운동을 해 온 중증장애인에게 비례대표를 주어야 된다고 했더니 그게 먹혀들었다.
 
그렇게 국회에 들어와서 보니까 우리 장애인관련 법들이 상당이 미흡했다. 선언적인 법들을 실질적으로 고쳐보자 해서 ‘장애인복지법’을 전면 개정했다. ‘차별금지법’ 대표발의도 했고 2월 국회에서 통과된 ‘중증장애인생산품 우선구매특별법’도 만들었다. 다만 ‘중증장애인 기초연금법’은 발의한 지가 2년이 돼 가는데도 저쪽 당의 반대로 여전히 계류 중이다.
 
또 하나, 여성을 비례대표의 절반까지 주고 있는 '공직선거법'을 장애인 비례대표 10%를 포함하도록 개정한다면 장애인 복지가 비약적으로 발전할 것인데 말처럼 쉽지가 않다.
 
그리고 발의는 못했지만 ‘장애인 노인 임산부 등에 대한 편의증진법’을 유니버셜 디자인 법으로 바꿔서 그야말로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문턱 없는 세상으로 만들고 싶다. 준비단계에 들어갔으니까 18대에 누군가가 만들 수 있을것이라는 생각이다.
 
비례대표를 연달아 하기는 힘들텐데, 공직선거법 장애인 비례대표 10% 요구가 통과돼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장애인 단체나 사회복지 단체, 특수교육 단체에서는 한 번 더 하라는 여론이 빗발쳐오기는 하지만 당론에 비례대표는 한 번이 원칙이어서 그것이 걸림돌이다. 지역구는 10번을 해도 괜찮고 비례대표는 한번밖에 못하는 것은 헌법소원감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한 번 더 하라면 당연히 해 볼 생각도 있다.
 
ⓒ최재원기자
장애인운동, 시민운동을 하면서 보람 있거나 기억에 남는 일 몇 가지만 얘기한다면.
과거 30여년간 내 직업은 침쟁이였다. 장애인 운동에 뛰어들게 된 것도 침 때문이었다. 지금도 맹학교에서는 교육법 43조인가에 의해 침을 가르치고 있지만 침을 가르치고도 면허를 안주니까 졸업하고 나오면 불법 무면허 업자가 된다. 옛날 일제시대 때는 침, 뜸, 안마면허증 등 세 개가 나왔다. 그런데 한의사들한테 침 면허증을 뺏기게 되면서 시각장애인 침쟁이 중에는 전과 한 두 개 없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시각장애인 직업이 마땅히 없는 마당에 침이라도 하게 해주면 훨씬 살기가 나아질텐데 싶어서 이것을 합법화하는 운동을 하다가 장애인 운동에, 또 시민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다.
 
그래서 시각장애인 전체를 모으고, 지금은 전국에 대 있지만 장애인단체총연맹을 부산에서 처음 만들었다. 시각장애애인연합회 회장을 하면서 부산에서 처음으로 회관을 하나 얻었다. 그 때 전국의 시각장애인 지도자들이 다 모였다. 시각장애인 역리협회는 16세기부터 있었는데 그 수백년 역사를 살펴봐도 우리가 협회 건물을 갖기는 이번이 처음이라며 전국의 지도자들이 모여 앉아서 울었다.
 
지난해에 안마가 위헌으로 판결이 났을 때 시각장애인들이 한강에서 뛰어내리고 국회 앞에서 데모를 하는 게 너무 안타까웠고 그 땐 국회의원이 된 것이 후회스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데 당내 여러 의원들이 협조를 해서 당론을 만들어주고 그 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켰을 때 정말 감회있고 보람을 느꼈다. 편의증진법 통과도 우리 장애인사에서 길이 빛날 일이다.
 
흔히 사회복지가 잘 된 나라의 문화수준도 높다고 하는데.
당연히 문화 수준이 높은 나라가 복지 수준이나 장애인에 대한 인식수준도 높다. 복지와 문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같이 간다. 장애인복지가 잘 된 나라의 국민 의식 수준도 높다는 얘기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도 과거에 비해서는 조금씩 좋아져가고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기독교 문화권에 비해 동양권 특히 유교 문화권, 불교 문화권에서는 장애인에 대한 이해가 뒤떨어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종교적인 의미도 많이 있을 것이다.
 
유교의 경우 지식이나 건강에 있어서 완벽과 완전을 추구하는 측면이 있는데 비해 장애인은 뒤떨어지며, 불교는 전생의 업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비교적 동양권이 여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듯이 장애인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고 인식개선도 잘 안 되고 있다.
 
공연 문화에 대한 관심은?
사실 장애인들이 문화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접근성이 문제가 된다. 휠체어 장애인들이 와도 못 들어가고 청각장애인들은 자막이 안돼서 힘들고, 시각장애인도 화면해설이 안되면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다. 장애인 관련 영화조차 그런걸 보면 안타깝다. 영화진흥법에 자막방송을 의무화하자는 내용의 법도 발의했다.
 
실제 지난해 세계장애인 한국대회에 3000여 명이 참가해 kbs에서 전야제 공연을 했는데 세계에서 휠체어 장애인이 200-300명이 왔는데 휠체어 길도 없고 자리도 없어서 못들어가게 됐다. 그래서 정연주 사장한테 전화해서 말했더니 마침 이해를 해줘서 앞에 있는 의지 200개를 뜯어서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결국 접근성이 확보돼야 하고 나아가서는 장애인석을 전문석을 만들거나 반액 할인을 해준다거나 하는 제도적 보완이 돼야 한다.
 
장애인 예술가 양성에 대해.
장애인 예술가에 대한 지원은 당연히 이루어져야 한다. 장애인인식개선협회를 하나 만들려다가 주춤하고 있는데, 예술에 뛰어난 사람들이 대중하고 접근을 하면 장애인 인식개선에 확실히 도움이 된다. 베토밴도 청각장애인이고 반고호도 정신 장애인이라고 얘기가 되고 있고, 실낙원을 쓴 밀턴은 시각장애인이었다. 장애인들이 불편한 몸과 마음, 혼을 불어넣는 측면에서는 장점도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시력은 언제 잃으셨는지?
보통 사람들이 맹학교에 다니면 눈이 전혀 안보인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학교 다닐 때만해도 20-30%는 봤다. 요즘은 60%정도가 본다. 그만큼 의학이 발달하니까 일반 학교에서 칠판의 작은 글씨가 안 보이는 사람들까지가 맹학교에 들어온다.
 
나는 3살, 6·25때 대구에 살 때, 대구가 점령당하자 죽어도 고향에 가서 죽자고 해서 군용열차를 타고 고향 상주로 가다가 산에서 날아온 폭탄 때문에 눈이 멀었다. 직접 맞지는 않고 화염이 눈에 들어갔다. 처음엔 눈물이 많이 나고 눈이 벌겋고 울고 했는데 좀 괜찮아져서 놔뒀다가 그랬다. 나중에 병원에 가보니까 너무 늦었다고. 시신경 위축까지 오고 있다고해서 가산을 탕진할 정도로 전국의 용한 데는 다 다녔는데 효력이 없었다.
 
지독한 음치인데도 섹소폰을 불었다고.
평생의 한으로 삼는 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눈 먼 것이고 하나는 노래를 못하는 것이다. 얼마나 노래를 못하느냐면 부산맹학교 시절 노래 부르기 시험을 쳤는데, 교감선생님이 시험관으로 들어오셨다.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던 교감선생님이 피아노 뚜껑을 덥고 다가오시더니 뺨을 한 대 때리면서 “니가 아무리 장난을 좋아해도 교감이 시험을 치는데 장난을 치느냐? 그게 중염불이냐 노래냐” 그 때 “아 내가 노래를 정말 못 부르는구나” 싶었다.
 
부산맹학교 졸업할 무렵에는 브라스밴드에서 테너 섹소폰을 불었다. 하도 할 사람이 없어서 힘이 쎈 내가 불었는데 화이강의 마치니, 다뉴브강의 물결 같은 곡을 다른 사람들은 한 시간, 늦어도 3시간이면 다 끝나는데 나는 일주일이 지나도 안됐다. 그 때 음악선생님이 “화원아 넌 두뇌적 음치와 음성적 음치를 겸한 희귀종”이라고 하셨다.
 
서울맹학교에서도 월요일 애국조회에서 음악선생님이 곡만 안 맞으면 “정화원 노래 부르지 마라”고 했다. 300여명이 같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나는 안불러도 내 흉내를 내니 날마다 “정화원이 노래 부르지 마라”는 소리가 한 두 번씩 나올 정도였다.
 
취미가 낚시라던데.
세 가지 취미 중 하나다. 스스로 미끼를 끼어서 낚싯대를 집어넣고 손맛도 느끼면서 고기를 잡을 수 있다. 그 감각은 시각장애인이 더 뛰어날 수 있다. 마라도부터 백령도까지 낚시터라고는 안 가본 데가 없다.
 
두 번째 취미는 독서다. 책을 많이 읽으면 일 년에 200권 이상 읽는다. 국회에 와서는 50-100권정도. 의학이나 철학, 과학서적은 점자로 읽고 소설류나 에세이집은 녹음도서로 읽는다. 음성 예쁜 사람들이 녹음해 놓은 것을 조용히 누워서 들으면 들을만하다.
 
세 번째는 취미는 여러 사람들 만나서 소주 한 잔 하면서 담소나 나누는 것이다. 내 기억에는 소주를 14병까지 마신 기억이 있다. 이홉들이 14병. 저녁부터 다음날 해 뜰 때까지 이홉들이 14병을 먹었다. 즐겁게 마시면 새로움이 솟아나고 허심탄회해지고 그런 게 좋다.
 
눈 멀고 나서 두세 가지 정도 삶의 좌우명이랄까 그런 게 있다. 첫 번째는 당당하게 살자. 두 번째는 즐겁게 살자. 그 다음에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자. 눈 감아서 이만큼 사는 것도 감사한다. 그러다보니 술도 먹게 된다.
 
얼마 전 중국에 가서는 상하이에서 백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이태백이 빠져 죽은 황주연못에 가서 이태백이가 신발 벗어놓았다는 자리에 앉아서 중국 술 빼갈 한 병을 마시고 왔다. 밝은 달밤에 한 잔 부어주고 나도 한 잔 먹고, 이천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빼갈 한 병을 이태백과 나눠먹고 왔다.
 
ⓒ최재원기자

 마지막으로 문화저널 21 독자들에게 한 말씀.
독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눈에 뵈는 게 없는 정화원 의원입니다. 가진 자가 더 즐거울 리도 없고, 건강한 사람이 더 즐거울 리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보고 이해하느냐, 이 문화를 삶을 즐기느냐에 따라 인생이 얼마든지 달라지고 그것이 건강한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인물이 못나서 어떻고, 키가 작아서 어떻고, 장애인이기 때문에 어떻고 하는 것은 핑계이고 소극적인 태도입니다. 어차피 태어난 세상, 살아가는 세상 더 열심히 더 즐겁게 살자고 생각하면 더 즐거워지고 행복해지고 희망을 갖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2008년 무자년 새해에는 마음을 한 번 바꿔보는 것, 마음을 긍정적으로 바꿔보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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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저널21 김홍래 /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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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승현 2008/02/28 [17:56] 수정 | 삭제
  • 국회의원 냄새가 아닌,,, 사람냄새가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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