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玄)의 구현(具現), 그리고 존재(存在)에 대한 물음
무는 사랑 안에서 맛볼 수 있는 하나의 경험이다.” 말한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2016~2017년 동안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제작한 나무와 까마귀의 변주 작품은 죽음과 부활의 중의적인 까마귀와 허공의 하늘을 향한 나무 그리고 켜켜이 쌓인 선(線) 등 소재로 하여 무한대(∞) 또는 뫼비우스의 띠를 형상화한 것이고 좌우 대칭과 동양철학에서 중도처럼 중앙을 텅 비운 듯 끊임없이 현(玄)이라는 공의 자리인 존재(道)로부터 윤회하는 생명의 운명을 표현하고 있는데 오방색의 색깔을 통해 자연과 우주의 변화원리까지도 담아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나무와 까마귀의 변주
칠성(七星) 김월수
블랙홀과 화이트처럼 중첩된 선(線)의 세계 비백(飛白)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와 함께
뫼비우스의 띠와 같이 휘돌아 날아가는 푸른 까마귀들
묵묵히 서 있는 물푸레나무 허공의 눈을 향한 나뭇가지마다
황금빛 햇살을 품고서 고개를 드는 생명의 꿈
서양화가 김갑진의 “나무와 까마귀의 변주”를 보고 쓴 시
응축(凝縮)된 선(線)의 미학 - 선화(線畵)의 세계로서 새로운 영역 탐구
무는 그 어떠한 파악 가능한 존재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무이지만 모든 존재자를 그 자체로서 존재하게 하는 긍정적인 근원이라는 점에서 존재 자체다)를 표현한다. 이것은 우주와 자연의 무한성이며 영원성이고 근원적인 본질이며 무(無)에 가깝다는 것이다. 2018년 The low of nature 작품은 사물처럼 어두운 사각형의 끝과 뚜렷하지 않은 원(空의 자리와 존재의 근원) 사이, 무채색에 가까운 붉은 기운이 감도는 것을 표현하는데 여기서 인식된 인간의 눈으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를 말하는데 불교에서 말하는 색(色)이 사라지고 공(空)이란 의식마저 사라진 상태로서 진공(眞空)의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The low of nature
칠성(七星) 김월수
모든 것이 녹아 있는 우주 오색영롱한 별빛으로 수놓듯
얼기 설킨 인연의 실타래 겹겹이 쌓인 시간의 화석
하얀 여백의 숨결로부터 운명처럼 살아난 생명의 불꽃
서양화가 김갑진의 “The low of nature”를 보고 쓴 시
특히, 2015년 회닉(晦匿) 작품은 중앙에 있는 촛불을 보면서 명상하듯 고요하고 무한의 세계로 이끈다. 그것은 텅 빈 우주의 심장이고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회귀해야 할 존재의 근원으로서 (空)의 자리인 도(道)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눈에 보이는 사물을 이루는 형과 상에 대해 알아보면 형(形)이라는 하는 것은 형체가 있는 것을 말한다. 형(形)의 반대 개념인 상(象)은 형체(形體)가 없다. 따라서 형(形)은 유형이고 상(象)은 무형(無形)이다. 여기서 말한 유무는 상(象)을 설명하기 위해서 형상(形象)의 구분하는 기준이고 그 기준을 형체에 두고 있다.
인간은 형은 볼 수 있지만, 상을 관찰하지는 못한다. 예를 들어 원자 세계와 같은 것은 물론이고 공기나 색소 같은 것도 상(象)인 것인데, 오행(五行)처럼 그의 본질은 다섯 가지의 상인데 다만 그것이 응결하여 형체를 이루게 되면 형이 되고 분열을 하여 기화하게 되면 그것을 상이라고 한다. 또한 도(道)의 원초적 상태를 무(無)라고 보고 “무(無)는 태극(太極)이 아직 나타나기 이전, 한 점의 텅 비고 신령스러운 기운으로서 이른바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無者 太極未判之時 一點太虛靈氣 所謂 視之不見聽之不聞也)”라 한다.. - 중국 도교사상가 진단(陣摶)의 ‘정역심법주(正易心法註’에서
작가는 기(氣)처럼 하나로 응축된 영혼의 숨결이 담긴 선(線)을 통해 무한(無限)과 무(無)의 세계로 가는 과정으로 작가의 작업 노트에서 "이 선(線) 하나하나는 나의 호흡이요 나의 세포이다.”, “독립된 선(線)은 무한(無限)으로 가는 과정이며 무(無)의 세계로 가는 과정이다.”, “무(無)로 가는 과정은 지워가는 과정이며 채워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 존재의 과정은 우주와 자연의 무한성이며 영원성이고 근원적인 본질이며, 무(無)에 가깝다.”라는 것으로 볼 때, 신라 의상(義湘, 625~702) 스님의 법성게(法性偈)에서 “하나는 전체이고 전체는 곧 하나다.”(一卽多 多卽一)의 연기(緣起) 사상으로 모든 존재가 연결되어 서로서로 비추며 존재한다는 뜻과도 일맥상통한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순수한 존재(存在)는 무(無)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여기서 존재와 무(無)는 같은 것인데, 존재는 존재이자 무(無)가 된다. “존재와 무의 진리는 한쪽이 다른 쪽으로 즉시 소실되는 운동이다.” 존재와 무는 모순을 사이에 두고 서로 하나이며, 바로 그래서 존재에서 무로의 소실(消失), 무에서 존재로의 생성(生成)이라는 원리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존재(存在)하는 것 스스로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무(無)에 대한 가능성을 알려주고, 이와 같은 가능성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서 그 자신을 알려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노자의 ‘도덕경’ 1장에서 말한다. “항상 무에서 그 오묘함을 보려 하고, 항상 유에서 그 돌아감을 보려 한다. 이 둘은 같은 근원에서 나왔으나 이름이 다르다. 이를 하나로 이름하여 현(玄)이라 한다. 오묘하고 오묘하니 모든 미묘함의 문이다(常無, 欲以觀其妙, 常有, 欲以觀其儌.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꺾이어 버린 나무의 변주
칠성(七星) 김월수
진공(眞空)의 미늘 사이로 보이지 않을 듯 가늘어진 호흡
고요한 침묵을 뚫고서는 켜켜이 쌓아 올린 선(線)의 시공간
겹치고 엮이듯 검고도 흰 무(無)라는 존재로부터
욕망(欲望)의 나뭇가지 꺾이어 버린 나무
속으로 옹이 품듯 인내로 성장한 내 영혼의 나무
서양화가 김갑진의 “꺾이어 버린 나무의 변주”를 보고 쓴 시
그 알 수 없는 경계의 저편에서 존재적인 상태로서의 무(無)가 드러나게 된다. 윌리엄 플로머의 “ 창조란 연결이 되어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을 연결하는 능력이다.”(Creativity is the power to connect the seemingly unconnected)이라는 말과 같이 작가는 영혼의 숨결이 담긴 하나의 선을 그으면서 자신만의 개념과 자신만의 세계를 구현하고 완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위그드라실과 까마귀
칠성(七星) 김월수
본질로 회귀하는 까마귀들의 군무 허공의 하늘로 뻗어가는 나무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의 교차로에서 무심히 바라본 내 영혼의 눈
인식의 경계를 초월한 공(空)의 자리 무극(無極)처럼 진공(眞空)과 함께
난 먼지와 같은 존재라 느끼는 순간 무아(無我)처럼 무한(無限)의 그림자
서양화가 김갑진의 “위그드라실과 까마귀”를 보고 쓴 시
2020. 09. 05 미술평론 김월수(화가·시인) <저작권자 ⓒ 문화저널21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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