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玄)의 구현(具現), 그리고 존재(存在)에 대한 물음

김월수 | 기사입력 2020/09/07 [09:55]

현(玄)의 구현(具現), 그리고 존재(存在)에 대한 물음

김월수 | 입력 : 2020/09/07 [09:55]

현(玄)의 구현(具現), 그리고 존재(存在)에 대한 물음

 

▲ 김갑진 作 나무와 까마귀의 변주 210x530cm Oil on canvas 2016~2017  © 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김갑진 작가는 달마대사가 9년 동안 면벽 수행(벽을 마주 대하고 좌선하는 수행)을 통해 궁극의 도를 깨닫는 것처럼 미명으로부터 촛불을 밝혀 길을 찾아내듯 캔버스를 마주하고서는 수백만 개의 선(線)들을 그어가는 과정에서 만물의 근원에 대한 사색과 명상을 통해 인식의 한계를 초월하듯 궁극의 끝에서 전체가 갖춘 보편성(존재의 바탕)과 부분이 갖춘 특수성(존재의 근원)이 공(空)의 자리와 같은 원융회통(圓融會通)으로서 현(玄)의 세계를 구현하고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이것은 덴마크의 철학자 케에르케고르는 “죽음과 명상은 무를 경험할 수 있는 두 가지뿐이다.

 

무는 사랑 안에서 맛볼 수 있는 하나의 경험이다.” 말한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2016~2017년 동안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제작한 나무와 까마귀의 변주 작품은 죽음과 부활의 중의적인 까마귀와 허공의 하늘을 향한 나무 그리고 켜켜이 쌓인 선(線) 등 소재로 하여 무한대(∞) 또는 뫼비우스의 띠를 형상화한 것이고 좌우 대칭과 동양철학에서 중도처럼 중앙을 텅 비운 듯 끊임없이 현(玄)이라는 공의 자리인 존재(道)로부터 윤회하는 생명의 운명을 표현하고 있는데 오방색의 색깔을 통해 자연과 우주의 변화원리까지도 담아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나무와 까마귀의 변주

 

칠성(七星) 김월수                   

 

블랙홀과 화이트처럼 

중첩된 선(線)의 세계

비백(飛白)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와 함께

 

뫼비우스의 띠와 같이 

휘돌아 날아가는 푸른 까마귀들

 

묵묵히 서 있는 물푸레나무

허공의 눈을 향한 나뭇가지마다

 

황금빛 햇살을 품고서

고개를 드는 생명의 꿈 

 

서양화가 김갑진의 “나무와 까마귀의 변주”를 보고 쓴 시

                      

응축(凝縮)된 선(線)의 미학 - 선화(線畵)의 세계로서 새로운 영역 탐구

 

▲ 김갑진 作 The low of nature 53x45cm Oil on canvas 2018  © 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작가의 작업은 의식의 거미줄처럼 일획에서 시작되고 선의 겹침과 응축으로 만들어진 3차원의 세계로부터 4차원의 세계와 그 너머의 세계로서 현(玄)의 세계를 구현하고 완성한다. 이것은 인식의 경계를 초월하여 절대적 무, 즉 존재적인 상태로서의 무(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의 무에 대해서 어떤 활동성과 존재 성격을 여전히 지니고 있고 이 무는 존재 자체의 다른 이름이라고 말한다. 

 

무는 그 어떠한 파악 가능한 존재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무이지만 모든 존재자를 그 자체로서 존재하게 하는 긍정적인 근원이라는 점에서 존재 자체다)를 표현한다. 이것은 우주와 자연의 무한성이며 영원성이고 근원적인 본질이며 무(無)에 가깝다는 것이다. 2018년 The low of nature 작품은 사물처럼 어두운 사각형의 끝과 뚜렷하지 않은 원(空의 자리와 존재의 근원) 사이, 무채색에 가까운 붉은 기운이 감도는 것을 표현하는데 여기서 인식된 인간의 눈으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를 말하는데 불교에서 말하는 색(色)이 사라지고 공(空)이란 의식마저 사라진 상태로서 진공(眞空)의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The low of nature

 

칠성(七星) 김월수 

 

모든 것이 녹아 있는 우주 

오색영롱한 별빛으로 수놓듯

 

얼기 설킨 인연의 실타래

겹겹이 쌓인 시간의 화석

 

하얀 여백의 숨결로부터

운명처럼 살아난 생명의 불꽃

 

서양화가 김갑진의 “The low of nature”를 보고 쓴 시

                 

▲ 김갑진 作 회닉(晦匿) 130.3x162.2cm oil on canvas 2015  © 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작가의 작업은 근원적인 존재의 본질로부터 선(線)이 무화(無化)되는 과정으로 '존재와 사색'(2011)을 발표하고 이어서 ' 참류(沉流)'(2013) 그리고 '회닉(晦匿)'(2015) 이르게 되었는데, 선(線)을 그어가는 과정에서 자의식이 무화(無化)되는 체험을 통해서 존재로서의 본질을 체득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어가는 선(線)은 형(形)이지만 무화(無化)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이면(裏面)의 존재인 상(象), 즉 근원적인 존재의 본질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2015년 회닉(晦匿) 작품은 중앙에 있는 촛불을 보면서 명상하듯 고요하고 무한의 세계로 이끈다. 그것은 텅 빈 우주의 심장이고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회귀해야 할 존재의 근원으로서 (空)의 자리인 도(道)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눈에 보이는 사물을 이루는 형과 상에 대해 알아보면 형(形)이라는 하는 것은 형체가 있는 것을 말한다. 형(形)의 반대 개념인 상(象)은 형체(形體)가 없다. 따라서 형(形)은 유형이고 상(象)은 무형(無形)이다. 여기서 말한 유무는 상(象)을 설명하기 위해서 형상(形象)의 구분하는 기준이고 그 기준을 형체에 두고 있다. 

 

인간은 형은 볼 수 있지만, 상을 관찰하지는 못한다. 예를 들어 원자 세계와 같은 것은 물론이고 공기나 색소 같은 것도 상(象)인 것인데, 오행(五行)처럼 그의 본질은 다섯 가지의 상인데 다만 그것이 응결하여 형체를 이루게 되면 형이 되고 분열을 하여 기화하게 되면 그것을 상이라고 한다. 또한 도(道)의 원초적 상태를 무(無)라고 보고 “무(無)는 태극(太極)이 아직 나타나기 이전, 한 점의 텅 비고 신령스러운 기운으로서 이른바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無者 太極未判之時 一點太虛靈氣 所謂 視之不見聽之不聞也)”라 한다.. - 중국 도교사상가 진단(陣摶)의 ‘정역심법주(正易心法註’에서 

 

작가는 기(氣)처럼 하나로 응축된 영혼의 숨결이 담긴 선(線)을 통해 무한(無限)과 무(無)의 세계로 가는 과정으로 작가의 작업 노트에서 "이 선(線) 하나하나는 나의 호흡이요 나의 세포이다.”, “독립된 선(線)은 무한(無限)으로 가는 과정이며 무(無)의 세계로 가는 과정이다.”, “무(無)로 가는 과정은 지워가는 과정이며 채워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 존재의 과정은 우주와 자연의 무한성이며 영원성이고 근원적인 본질이며, 무(無)에 가깝다.”라는 것으로 볼 때, 신라 의상(義湘, 625~702) 스님의 법성게(法性偈)에서 “하나는 전체이고 전체는 곧 하나다.”(一卽多 多卽一)의 연기(緣起) 사상으로 모든 존재가 연결되어 서로서로 비추며 존재한다는 뜻과도 일맥상통한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순수한 존재(存在)는 무(無)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여기서 존재와 무(無)는 같은 것인데, 존재는 존재이자 무(無)가 된다. “존재와 무의 진리는 한쪽이 다른 쪽으로 즉시 소실되는 운동이다.” 존재와 무는 모순을 사이에 두고 서로 하나이며, 바로 그래서 존재에서 무로의 소실(消失), 무에서 존재로의 생성(生成)이라는 원리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존재(存在)하는 것 스스로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무(無)에 대한 가능성을 알려주고, 이와 같은 가능성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서 그 자신을 알려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노자의 ‘도덕경’ 1장에서 말한다. “항상 무에서 그 오묘함을 보려 하고, 항상 유에서 그 돌아감을 보려 한다. 이 둘은 같은 근원에서 나왔으나 이름이 다르다. 이를 하나로 이름하여 현(玄)이라 한다. 오묘하고 오묘하니 모든 미묘함의 문이다(常無, 欲以觀其妙, 常有, 欲以觀其儌.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 김갑진 作 꺾이어 버린 나무의 변주 50x95cm oil on canvas 2015  © 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작가의 작품에서 선(線)이 만든 현(玄)의 세계, 검은 바탕은 카오스(chaos)의 세상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든 생명(生命)과 형상(刑象)이 잠재된 무한의 세계이기도 하다. '꺽이어 버린 나무의 변주'(2015) 시리즈에서는 음양오행에 기초하여 오방색을 사용하고 '선요(鮮耀)-나무'(2016),'물지정(物之精)-알레프'(2017), '위대한 침묵'(2015) 등에서 선(線)의 세계가 만드는 카오스(chaos)의 세상을 응시하듯 주변에서 중심부로 향하는 동안, 무한대로 가는 우주의 시공간 같은 존재의 바탕을 창조하고 존재의 물음을 던지고 있다. 현(玄)과 요(幺)는 종말(끝)과 시작(시초) 외에 또 다른 상반되는 이미지를 공유하다가도 분리되는데, 그것은 무한히 큰 것(무한대)과 무한히 작은 것(무한소)이라는 개념이다.

 

꺾이어 버린 나무의 변주

 

칠성(七星) 김월수               

 

진공(眞空)의 미늘 사이로

보이지 않을 듯 가늘어진 호흡

 

고요한 침묵을 뚫고서는

켜켜이 쌓아 올린 선(線)의 시공간

 

겹치고 엮이듯

검고도 흰 무(無)라는 존재로부터

 

욕망(欲望)의 나뭇가지 

꺾이어 버린 나무

 

속으로 옹이 품듯

인내로 성장한 내 영혼의 나무

 

서양화가 김갑진의 “꺾이어 버린 나무의 변주”를 보고 쓴 시

 

▲ 김갑진 作 위그드라실과 까마귀 120x150.cm oil on canvas 2016  © 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위그드라실과 까마귀'(2016), '나무와 까마귀의 변주'(2017) 현상의 세계에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두 개의 순환이 서로 중앙에서 엮이고 이어지는 것을 나타내면서 하나의 끝이 다른 하나의 시작에서 이어지는 개념(槪念)이다. 이러한 끝이 곧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지고 무한대로 가다가 보면 작아져서 어느 시점부터 끝으로 간주하는지를 알 수 없게 된다. 

 

그 알 수 없는 경계의 저편에서 존재적인 상태로서의 무(無)가 드러나게 된다. 윌리엄 플로머의 “ 창조란 연결이 되어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을 연결하는 능력이다.”(Creativity is the power to connect the seemingly unconnected)이라는 말과 같이 작가는 영혼의 숨결이 담긴 하나의 선을 그으면서 자신만의 개념과 자신만의 세계를 구현하고 완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위그드라실과 까마귀      

 

칠성(七星) 김월수

                           

본질로 회귀하는 까마귀들의 군무 

허공의 하늘로 뻗어가는 나무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의 교차로에서

무심히 바라본 내 영혼의 눈

 

인식의 경계를 초월한 공(空)의 자리

무극(無極)처럼 진공(眞空)과 함께 

 

난 먼지와 같은 존재라 느끼는 순간

무아(無我)처럼 무한(無限)의 그림자 

 

서양화가 김갑진의 “위그드라실과 까마귀”를 보고 쓴 시

 

▲ 왼쪽부터 주역연구가 이병수, 김갑진 작가, 벤쟈민 유 관장, 미술평론가 김월수  © 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김갑진 작가는 독학으로 시작해서 30년 동안의 1000점 이상의 그림을 완성했고 이후 그림으로의 여행은 계속 이어질 것이며 그의 영혼이 살아있는 그림의 숲에서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안과 희망을 얻게 될 것이다. Able Fine Art NY Gallery 서울관과 미국 13회 개인전 150여 회의 단체전 참여했고, 전남 곡성에 자리를 잡은 123박물관&김갑진갤러리를 운영하면서 왕성한 활동 중이다.

 

2020. 09. 05 미술평론 김월수(화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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