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한국전쟁 70주년…한국의 전기통신⑨

[제2기] 대한제국의 전기통신 (1897~1910년) 청일전쟁과 동학군의 전신선 절단

이세훈 | 기사입력 2020/04/14 [08:54]

[기획] 한국전쟁 70주년…한국의 전기통신⑨

[제2기] 대한제국의 전기통신 (1897~1910년) 청일전쟁과 동학군의 전신선 절단

이세훈 | 입력 : 2020/04/14 [08:54]

[제2기] 대한제국의 전기통신 (1897~1910년) 청일전쟁과 동학군의 전신선 절단 

 

우리역사에 있어서 1894년과 1895년 사이의 기간은 격동의 기간이다. 반봉건주의와 반제국주의의 기치를 담은 동학혁명이 일어났고, 동학혁명 진압을 빌미로 하여 조선 땅을 무대로 청일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조선을 둘러싸고 전개된 열강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침략경쟁은 1884년 갑신정변 후부터 더욱 가열된다. 청나라와 일본의 침략적 대립은 더욱 격화됐다. 인천-한성-의주, 한성-부산, 한성-원산 전신선의 가설을 통해서도 증명된다. 특히 영국과 러시아 까지도 조선 문제로 충돌한다. 영국은 거문도에 상륙하고 상해까지 해저전신선을 가설하기에 이른다. 

 

일본은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을 통하여 크게 약화된다. 조선정부나 일본에게 골치 아픈 심각한 문제를 안겨준 것은 바로 동학군과 명성황후 시해에 항의했던 을미의병의 전신선 절단이다. 상황 보고수단인 전신선이 막힌다면 통신마비로 사실상 막대한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 

 

1894년 전북 고부 군수의 학정에 반대하여 전봉준 등을 중심으로 시작한 동학 농민운동은 퍼져나갔다.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을 지키고 조선 왕조의 부정부패를 바로 잡는 것이다. 동학군은 전주성까지 진입하게 된다. 정부는 동학군을 자력으로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청나라에 군사를 요청하게 된다. 청나라 군이 조선에 들어오자 일본도 거류민 보호를 이유로 조선에 들어온다. 일본이 1885년 청과 맺은 텐진조약을 근거로 조선에 침입하여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이 관군을 크게 물리친 격전지인 정읍 황토현 전적지(사적 제295호, 사진제공=국가문화유산포털) 

 

청나라 군이 1894년 5월 2일 아산만에, 1894년 5월 9일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하게 된다. 이들은 우선 군사용으로 신속한 통신수단이 필요했다. 조선 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들어줄 여건이 되지 못했다. 청나라는 군사행동에 대비하여 의주-한성 서로전신선의 정비에 힘썼다. 서로전신선은 당시 사회 인심의 불안으로 말미암아 절단 사고가 빈번했다. 가설 후 이미 10년이 지나 전신주의 노후도 심했다. 청나라는 전신선이 단절될 경우 신속한 수리를 위해 조선 정부에 각별히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다. 청나라는 조선전보총국으로 하여금 천안에 전보분국을 설치하게 하고 아산에 이르는 지선을 가설하게 된다. 한성에서 청나라 군의 주둔지인 아산 간에 군용전선을 구성한다. 

 

한성-부산 남로전신선이 자주 불통됨에 따라 일본도 신속한 수리를 수시로 요청해왔다. 조선정부는 일본의 요구대로 남로전신선을 이미 보수하였으니 아무런 불편이 없음을 지적하고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원래 침략전쟁을 기도하고 있던 일본은 우리 정부의 강경한 거부에도 아랑곳없이 무리한 자기주장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일본은 야전전신대 800명이 부산과 인천에 각각 상륙하여 부산-대구-충주-한성의 새로운 남로전신선로를 불법 건설하게 된다. 그리고 한성-인천 간에도 새로운 군용전선을 무단가설 했다. 

 

▲ 동학농민혁명의 세 영웅(왼쪽부터)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사진제공=정읍시)


1894년 청일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우리의 전신사업은 사실상 전면 중단상태로 빠지고 말았다. 한성-의주 서로전신선이 일본군에게 접수되고 한성-원산 북로전신선도 그들이 점용하게 된다. 한성-부산 남로전신선은 동학군의 전주전보분국 점거 이후는 완전한 소통을 할 수 없었다. 1894년 6월 23일 아산만 입구의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군 함대가 청나라 함대를 공격하면서 일으킨 사건으로 청일전쟁이 발발하게 된 것이다. 

 

한편, 청일 전쟁은 일본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아산만 풍도해전의 승리에 이어 천안 성환 전투에서 청나라 군을 대파한다. 9월 15일 평양전투에서 나머지 청나라 군을 무찌름으로써 한반도에서의 청나라 세력을 완전히 후퇴시켰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본의 압승이었다. 다음해 1895년 3월 23일 청·일 간에 강화조약이 조인됨으로써 전쟁상태는 일단 끝난다. 따라서 일본군이 전쟁에 사용되었던 전신선로는 마땅히 조선 정부에 반환되어야 하나 미루고 있다가 1896년 전보사가 설치되고 비로소 본격적으로 다시 사용하게 됐다.

 

이세훈 

KT 시니어 컨설턴트

한국경제문화연구원 ICT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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