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사라의 풍류가도] 인연에도 유통기한이 있다

홍사라 | 기사입력 2023/07/11 [10:50]

[홍사라의 풍류가도] 인연에도 유통기한이 있다

홍사라 | 입력 : 2023/07/11 [10:50]

작년 말, 올해로 들어오면서 이상징후가 포착되었다. 마치 6년 전 그때가 다시 플레이되는 듯한 그런 싸~한 느낌. 이상한 기시감. 내 일상생활은 평소와 다르지 않게 흘러가고 있는데, 나를 둘러싼 환경이 조금씩 달라지는 있었다. 특히 몇몇 가까운 사람들의 변화가 강하게 느껴졌다. 아, 또 그때가 왔구나.

 

우리가 ‘친한 관계’ 내지는 ‘인연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에는 여러 레벨이 있는 것 같다. 피라미드 구조로 표현을 해보자면 삼각형의 가장 아래 레벨에 있는 관계는 만난 지 얼마 안 된 관계, 약 1년 전후의 관계로 주로 사회생활을 통해 만난 사이다. 아직은 서로 감출 것은 감추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품위를 지키는 그런 사이.

 

그 다음으로는 만난 지는 한 3~5년 정도 지난 사회나 일상생활 중 어딘가에서 만나진 사이로 서로의 사정을 적당히 아는 관계, 이 정도에서는 내 사정을 어느 정도 오픈했지만 그래도 숨기고 싶은 부분은 적당히 숨기면서 굳이 드러내지는 않는 그런 관계. 그 위에는 알게 된 지 5-10년은 된 사이로, 이 정도 되면 서로의 집안 사정을 얼추 파악하고 있어 서로를 대하는 데 있어 불편함이 거의 없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관계.

 

그리고 그 위에는 10년을 훌쩍 넘긴 사이라 집안에 수저가 몇 개인지까지 파악이 되는 나름 찐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관계. 그리고 제일 꼭대기 최상위층에는 소위 ‘00 친구’라고 불리는 사이로 나의 성장 과정까지 다 알고 있으니 뭔가를 숨기고 싶어도 숨기기 어려운 공기층 같은 진짜 찐인 그런 관계가 있다. (물론 관계 피라미드는 꼭 알고 지낸 햇수에 의한 것만은 아니며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적어도 위의 두세 계층 정도에는 내게 무슨 일이 있을 때 내 속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을 수 있는 것 같다. 예를 들면 가끔씩 찾아오는 인생의 위기 상황에 전화를 걸어 체면을 차리지 않고 징징거린다거나 이러이러해서 너무 힘들다고 솔직히 내 속을 뒤집어 보여주고 도와달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정도는 되는 사이. 이런 관계들은 대부분 일 년에 몇 번 연락한다고 해도 어색하거나 섭섭하지 않고 어제 만나고 또 만나는 사이처럼 편안하다. 그리고 평생을 가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믿음도 있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느 “때”가 되면 관계 피라미드의 상위층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멀어지는 일들이 발생한다. 평소 같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을 뱉는다거나, 그 사람답지 않게 정도가 지나치게 화를 불쑥 낸다거나, 딱히 배신까지는 아닌데 기분이 묘하게 나쁜 일들이 반복적으로 발생한다거나, 왠지 내가 알던 사람이 좀 변하는 것 같은 일들을 겪게 될 때가 있다. 굳게 믿고 있던 관계이다 보니 이런 일들을 겪었을 때 적당히 친분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같은 일을 겪었을 때보다 상처도 많이 받고 실망도 크다.

 

  © 홍사라

 

대화를 통해 풀어나갈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어떤 일들은 각자가 정해둔 개개인의 선을 크게 벗어나 버리기도 한다. 너무 멀리 가버리면 그 관계는 완전히 예전으로 돌리기 어려워지기도 하고. 이렇게 달랑달랑해진 인연을 마주 대한다는 것은 속상하고 슬픈 일이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오래된 인연이라 완전히 끊어버리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예전처럼 대하자니 껄끄럽고.

 

속이 시끄러웠던 어느 날 밥을 하긴 귀찮고 편의점 도시락을 때워야겠다 싶어 동네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오후 시간이라 그런지 도시락이 많이 남아 있지도 않았는데, 맘에 드는 도시락을 집어 드니 유통기한이 내일까지다. 그걸 보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어쩌면 우리들의 인연에도 유통기한 같은 게 있는 건 아닐까?’

 

편의점에서는 도시락을 유통기한이 지나면 매대에서 치워버린다. 그렇다고 바로 완전히 상해서 먹을 수 없는 것은 아니고 하루 이틀은 먹을만해서 버리기 아까우면 아르바이트생들이 챙겨가 먹기도 한다고 들었다. 오래된 하지만 바래져 가는 인연도 이 도시락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통기한 안에는 눈에 잘 띄는 매대에서 시원하게 자리 잡고 자신을 드러내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뒤로 사라지는 도시락처럼, 오래된 인연도 어떤 사건들로 더는 예전 같은 마음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래도 관계를 이어나가며 관계 피라미드 내의 다른 칸으로 이동하게도 되는 것 같다.

 

완전히 끊어내고 안 보는 사이도 있겠지만 그저 예전만큼은 아닌, 예전과는 조금 다른, 또 다른 어떤 관계로 옮겨지는 사이. 아주 끈끈한 관계로의 유통기한이 끝이 났어도 또 다른 형태로 좋은 관계를 맺고 살 수 있다면, 그다지 슬픈 일만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비워진 그 자리는 새로운 누군가로 또 채워지겠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무슨 책에도 나왔었는데 제목은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의 상황에 크게 변화가 올 때, 가장 먼저 내 주변 상황이 변하게 되는데, 그중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이 가장 먼저 바뀐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살면서 의도치 않게 사람들이 한 번씩 훅 정리되는 시기가 있었다. 그때마다 인생의 방향에도 크게 변화가 나타났던 것 같다. 그리고 대부분 그 시기는 가장 적당한 때에 옳은 방향으로 나를 움직이게 했다.

 

그래서 나는 모든 관계에도, 아무리 가까운 인연에도 각각의 유통기한이 있다고 생각한다. 유통기한이 끝나기 전까지 그 관계에서 최선을 다하고 유통기한이 지나고 나면 다른 형태로 그 관계를 이어가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나의 인생에 조금 더 기대를 걸어봐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있을 때 잘하자는 말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곁에 있을 때 잘하고, 떠날 또는 달라질 인연이라면 힘들여 붙잡고 있지 말고 놓아주는 것이 어쩌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작년 말부터 나의 사람들이 달라지고 있다. 달라진 관계에 슬퍼하기보다, 이것이 또다시 나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줄지 기대해보기로 했다.

 

홍사라

전형적인 이공계생의 머리와 문과생의 감성을 가지고 있다.

어릴때부터 음악과 미술, 동물과 책을 좋아했다.

전공과는 다르게 꽃과 공간을 다루는 플로리스트라는 직업을 선택해 호텔에서 ’꾸미는 사람‘으로 오래 일했고, 세계 최초의 플로리스트 협회이자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AIFD(American Institute of Floral Designers)의 멤버이다.

꽃일을 하는동안 있었던 일들을 ’꽃 한 송이 하실래요’라는 책으로 엮어 출판했다.

꿈꾸고 감사하고 사랑하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추구해야 할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지독한 ’풍류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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