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사라의 풍류가도] 꿈도 늙는다

홍사라 | 기사입력 2023/11/17 [09:50]

[홍사라의 풍류가도] 꿈도 늙는다

홍사라 | 입력 : 2023/11/17 [09:50]

  © 홍사라

 

누구나 어릴 때부터 시도 때도 없이 들어온 말, ‘넌 꿈이 뭐니?’ 

 

그 말을 제일 처음 기억나는 날은 아마도 내가 7살 내지는 8살쯤 되었을 때인 것 같다. 나는 엄마 손을 잡고 있었고, 엄마는 엄마 친구분들이랑 어딘가를 가다가 잠시 길에 서서 대화를 하고 계셨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대화를 하다말고 그중 가장 목소리 크고 발랄해 보였던 한 아줌마가 나를 지긋이 바라보더니 나에게 물었다. 

 

“넌 꿈이 뭐니? 나중에 뭐 되고 싶어?” 

 

갑자기 들이닥친 질문에 어린아이였던 나는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잘 몰랐다. 꿈이라는 단어를 알지만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꼬마라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엉뚱한 대답을 했던 것이 기억난다. 동네 친구 중에 한 여자아이가 유독 예뻤는데, 그 아이는 혼혈이었다. 그 아이를 보면서 나는 아버지가 어느 나라 사람인인지는 모르지만 엄마,아빠 둘 중 한 사람이 한국 사람이 아니면 예쁜 아이가 태어난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순간 “나중에 외국인이랑 결혼하려고요.”라고 대답했었다. 아주머니들이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던 것이 기억이 난다. 

 

그 후로 학교에서도 장래희망을 적어낼 때 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아빠가 하는 일이 멋있어 보여 나도 그 일을 하겠다고 써서 내는 정도였달까. 그때의 난 내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내 진짜 꿈은 뭔지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라. 학교에 가고 집에 오고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동생이랑 강아지랑 놀면서 하루를 보내는 꼬마 아이가 뭐 얼마나 그렇게 깊은 생각이란 게 있었을까. 학교를 다니면서부터는 매년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써서 내야 했다. 무슨 공식 질문처럼. 그때마다 나는 주로 아빠를 따라 ’과학자’라고 썼던 것 같다. 

 

연례행사처럼 그저 형식적으로 그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다가 나름 진지하게 그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바로 대학입시원서를 써야 했을 때이다. 다들 점수에 맞춰서 학교를 선택하는 것이 최선이라 여겨지던 때였지만 고집이 셌던 나는 좀 달랐다. 성적이 얼마가 나오든 간에 내가 원하는 곳에 지원해보고 싶었다. 그러니 나는 스스로에게 적어도 어디에 지원하고 싶은지에 대한 대답은 할 수 있어야 했다. 잠시 꿈에 대한 고민을 살짝 해봤다. 근데 잘 모르겠더라. 내가 유전공학과를 지원했던 이유는 당시 내가 좋아하던 소설가 로빈 쿡의 돌연변이 같은 책이 많이 읽었던 데다가 생명과학이 태동하던 시기라 뭔가 멋있어 보이기도 했고 아빠도 과학자니까 더 그럴듯해서 그렇게 지원했다. 생각해보면 진짜 내가 뭘 원하는지 생각하고 결정했다기보다는 그냥 있어 보이는 과를 선택한 것 같기도 하다. 뭐 고등학교 때 나름 생물을 좋아하기도 했고.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는 한동안 잊고 있다가, 꿈이 뭐냐는 질문을 또 맞닥뜨린 것은 직업을 선택해야 했을 때다. 물론 학과에 연관된 곳을 가는 게 순리겠지만 왠지 모르게 난 이때부터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그리고 조금 용기를 내어 어릴 때부터 타고난 재능이 있다고 믿었던 분야에 도전이란 걸 하기 시작했다. 다들 왜 굳이 힘든 길을 가냐고 물을 때도 나는 열정이 그득했다. 뭔가 내가 꿈을 찾아가는 것 같았달까. 한동안은 그 꿈이라는 걸 그려가며 그걸 이뤄가며 살았던 것 같다. 그렇게 열정적인 삶을 사는 게 힘들 때도 있었지만, 매해 이루고 싶은 목표리스트들을 만들고 연말에 빨간 줄을 하나하나 그어가며 얼마나 뿌듯해했는지 모른다. 사람들이 내게 그 꺼지지 않는 열정이 부럽다고 했을 때도 나에게는 당연한 일이었기에 왜 부럽다 하는지 그 이유를 몰랐다. 그래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냥 해보라고 말했다. “그냥 하면 되지 뭐. 안 그래?” 가 나의 기본 스텐스였다. 그때의 나는 그랬다.

 

그러던 내가 달라졌다. 여러번의 좌절을 겪으면서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어가니 꿈과 현실이 부딪히는 걸 느꼈다. 내 꿈은 뭔가 터무니없고 이루어질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현실이 가까이 체감이 되니 열정이 힘을 내지 못했다. 특히 어린 나이가 아닌 나름 지긋한 연령대가 되고 나니 더 그렇더라. 어릴 때는 아무리 황당한 사이즈의 꿈을 얘기해도 나는 그 꿈을 당연히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았고, 주변 사람들도 꿈은 크게 꾸는 게 좋은 거라며 허허 웃으며 그 꿈에 응원을 보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꺼내기도 쉽지 않지만, 용기내어 꺼내더라도 아직도 꿈을 꾸냐며 이제는 현실을 인정도 할 줄 알아야 하는 때라며 뜬구름 잡는다는 눈빛으로 돌아올 때가 많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 꿈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상대 눈의 동공은 더 커지는 것 같다. 말이냐 방귀냐 하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핵 개인의 시대’를 집필한 송길영 작가님이 평균 31살이 되면 더이상 새로운 노래를 듣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다른 사람이고 싶어서인지 요즘 산책을 할때마다 best100 같은걸 듣는다. 그러다 이 노래를 들었다. 악동뮤지션의 후라이의 꿈. 마음에 훅 들어왔던 가사는 이랬다.

 

“저 거위도 벽을 넘어 하늘을 날을 거라고

달팽이도 넓고 거친 바다 끝에 꿈을 둔다고

나도 꾸물꾸물 말고 꿈을 찾으래

어서 남의 꿈을 빌려 꾸기라도 해

내게 강요하지 말아요 이건 내 길이 아닌걸

내밀지 말아요 너의 구겨진 꿈을

 

고래도 사랑을 찾아 파도를 가를 거라고

하다못해 네모도 꿈을 꾸는데

아무도 꿈이 없는 자에겐 기회를 주지 않아

하긴 무슨 기회가 어울릴지도 모를 거야”

 

이 노래는 니꿈을 나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자긴 그냥 흐르는 대로 살거라고 하는 가산데, 이상하게도 나는 거위, 달팽이, 고래, 네모도 꿈을 꾼다는 대목에 꽂혔다. 그래 쟤네도 꿈을 꾼다는데! 나이나 상황이 뭐 대수냐. 네모도 꿈을 꾼다잖아.

 

나는 얼마전까지 세상에, 현실에 눈을 맞춰 당장이라도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실현가능한 꿈만 꾸려고 했었다. 그래 나도 이제는 정말 어른이라면서. 그런 소박함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꿈을 꾸려고 노력했던 몇 년 동안 나는 꿈을 꾸는 게 불편했다. 괜찮을 것 같았지만 괜찮아지지 않았고, 뭔가 그 꿈의 모습이 되려는 나로 연기를 하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된 것은 그건 내 모습이 아니란 거였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부합하려던 노력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노력해보려던 꿈은 내 모습도 아니고 나와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니 불편하지.

 

다시 나다운 꿈이란 걸 꾸려고 하니 그러기에는 뭔가 용기가 나질 않았다. 이래도 되는 걸까… 너무 늦은 건 아닐까…. 실패도 많이 해봤던 터라 남들 말처럼 터무니없는 말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다 만난 노래가 ‘후라이의 꿈’이다. 뭔가 ‘턱’하고 나를 치는 것 같았다. ‘그래. 나이가 상황이 뭐 그렇게 중요한가? 꿈을 꾸는데 무슨 나이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몇 살이든 상황이 어떻든 꿈을 꾸겠다면 꾸는 거지. 내 맘이지. 되면 되는 거고 안되면 어쩔수 없지, 그런데 꿈을 꿔보지도 않으면 그건 그냥 안 되는 거잖아.’ 라고 내가 나에게 말하게 되더라. 그날 산책은 유난히도 발이 가벼웠다.

 

지금 내가 꾸려는 꿈은 크기도 작지 않지만, 아직 선명하지도 못하다. 하지만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걸 찾을 때까지는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시간을 내어 집중해서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렇게 들여다보고 걸어가다 보면 언젠가는 구체적으로 손에 잡힐 무엇을 만나게 되겠지. 꿈이란 것도 자꾸 꾸어주지 않으면 늙는다. 그렇게 늙고 사라지게 두면 남은 인생이 너무 지루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내 꿈이 늙지 않도록 돌봐주고 다시 꾸어봐 주기로 했다. 남들이 뭐라든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공기 중에 겨울내음이 가득하다. 마음까지 쌀쌀해지지 않게 시간을 내어, 제쳐두었던 꿈을 다시 꺼내어 꾸어 보는 것은 어떨까? 좀 따뜻한 겨울이 되지 않을까?

 

홍사라

전형적인 이공계생의 머리와 문과생의 감성을 가지고 있다.

어릴때부터 음악과 미술, 동물과 책을 좋아했다.

전공과는 다르게 꽃과 공간을 다루는 플로리스트라는 직업을 선택해 호텔에서 ’꾸미는 사람‘으로 오래 일했고, 세계 최초의 플로리스트 협회이자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AIFD(American Institute of Floral Designers)의 멤버이다.

꽃일을 하는동안 있었던 일들을 ’꽃 한 송이 하실래요’라는 책으로 엮어 출판했다.

꿈꾸고 감사하고 사랑하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추구해야 할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지독한 ’풍류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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