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시] 뒤란의 시간 / 박형준

서대선 | 기사입력 2020/07/14 [08:34]

[이 아침의 시] 뒤란의 시간 / 박형준

서대선 | 입력 : 2020/07/14 [08:34]

뒤란의 시간

 

   뒤뜰이라는 말을 고향에서는 뒤란이라고 불렀다. 뒤란에

는 대숲이 있고 감나무가 있고 그 감나무 아래 장독들이 놓

여 있었다. 뒤란에는 새들 먹으라고 사발에 흰 밥알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장독대에서 퍼내는 것들은 구수한 이야기가

되었다. 앞뜰에서 하지 못하는 속이야기를 우리들은 뒤란에

서 할 수 있었고, 새하고도 먹을 것을 나눠 먹을 줄 알았다.

감나무에서 떨어진  떫은 감을 뒤란의 그늘로 가득한  장독

뚜껑에 올려놓고 우려먹던 맛은  또 어땠는지. 한여름, 장독

대 위에서 익어가며 땡감이 홍시처럼 달콤해지는 시간이 뒤

란에는 있었다.  

 

# “장독들”이 놓여 있던 “뒤란”은 어머니의 보물창고이자 어머니께서 집전하시던 제단이 있던 곳으로, 장독대는 어머니의 신전이자 한 집안의 음식 맛을 결정하고 보전하는 곳이었다. 옛날 사람들은 장에서 덕성을 읽으셨다. 장은 모든 음식에 필요하며, 다른 맛을 섞어도 제맛을 잃지 않으며, 오래 보관하여도 상하지 않는다. 된장은 비리거나 기름진 것들의 냄새를 제거하고, 다른 음식과도 조화를 잘 이룬다. 어머니께서는 정성과 치성 속에 숙성된 장을 먹고 자란 자손들이 장이 지닌 덕성을 내면화(lnternalization) 하여 인간관계나 삶의 현장에서도 장의 덕성을 발휘하길 바라셨다. 

 

집안의 음식 맛은 장맛에 달렸기에 ‘장’을 담글 때는 택일을 하고, 외출도 삼가고,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하셨다. 장 담그는 날은 주로 음력 정월, 말의 그림이 들어 있는 날로 택하여 집안의 왕성한 기운이 들어오고 풍요롭기를 기원했다. 장을 담글 때, 정성을 다함은 물론이고 장독대에선 허튼 몸가짐이나, 입놀림, 궂은표정도 삼갔으며, 장이 숙성되는 시간 동안 장독대는 어머니의 신전이 되었다. “뒤란”의 장독대에서 어머니는 첫 새벽마다 정화수(井華水) 한 사발 떠 놓고 집안 식구의 안녕을 기원하고, 우환을 막아 달라거나, 대처에 나가 있는 자손의 성공을 기원하셨다. 

 

“뒤란의 시간”이 내면화된 삶을 살아간다면, 늘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과 기도를 기억할 것이다. 장 만드실 때 어머니의 정성과 몸가짐은 자신의 행동강령이 되어 행동 하나하나에도 장 속에 든 덕성을 실천하게 될 것이다. 먹걸이가 부족했던 시절, 장마와 태풍에 떨어진 풋감을 소금물에 담가 두었다 떫은맛이 가신 감을 건네주시던 뒤란은 새들도 찾아와 “먹을 것을 나누던” 곳이다. 그뿐이랴, “앞뜰에서 하지 못하는 속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뒤란”은 ‘밀실’ 역할도 하였다. 동네 아낙들이 시집살이의 고단함과 삶의 애환을 털어놓고, 서로서로 다독여주던 “뒤란”을 정신 속에 가진 사람은 타인의 고통과 슬픔도 함께할 줄 알며, 지상의 모든 생명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으리라. 

 

문화저널21 편집위원 서대선 시인 seodaese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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