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시] 지갑 / 나석중

서대선 | 기사입력 2024/02/05 [10:35]

[이 아침의 시] 지갑 / 나석중

서대선 | 입력 : 2024/02/05 [10:35]

지갑

 

이젠 채우기보다

꺼내 베풀어야 할 때에야

옆구리 터져 너덜너덜한 지갑

푼돈 몇 푼으로 견딘 허기진 세월

불평불만 한 번 뱉지 않고

묵묵히 동거해온 지가 어언 20여 년

아비는 지갑의 신하가 되지 못하고

아비는 지갑을 잘 모시지 못하고

아비는 그래서 가난한지

지갑을 선물 받을 때

배부른 지갑이 되어달라는 뜻이었겠지

정작 너를 위해서는

한 번도 열어보지 못한 지갑

인제 그만 버릴까 말까 하다가도

딸내미 얼굴이 어른거려서 

한참을 만져본다

 

# ‘40년 두 넘었지’, 양복 안주머니에서 꺼낸 선생님의 지갑을 본 우리는 깜짝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선생님의 지갑은 “옆구리 터져 너덜너덜한” 정도가 아니었다. 반지갑의 테두리 실밥은 거의 삭아 있었다. 조심스레 걷어 올려진 지갑의 겉뚜껑은 가죽이 아니라 마치 검은 거즈 천처럼 보였다. 사 십여 년 이상 품었던 지갑이라면 혹시 첫사랑의 선물일까? 아니면 “배부른 지갑”을 지니라며 부모님께서 사주신 것일까? 

 

궁금해하는 제자들의 표정을 읽으셨는지, 첫 부임지였던 학교에서 가르쳤던 첫 제자가 선물한 지갑이라고 말씀하셨다. 지갑의 실밥도 삭고 형태도 무너졌으나, 제자의 마음이 담겨있던 지갑이었기에 버릴 수 없었다고 했다. 선생님께서는 더는 사용할 수 없게 된 낡은 지갑 속에    보고 싶은 제자들의 이름을 적은 종이를 넣어두고, 가끔 꺼내 보곤 하셨단다. 제자들이 선생님의 구순 잔치를 열어드렸던 날이었기에 안주머니에 넣어 오셨다고 했다. 낡고 삭아서 흩어져 버릴 것 같은 지갑에선 돈 대신 반듯하게 접힌 얇은 종이가 나왔다. 그 종이엔 제자의 이름들이 가득 적혀있었는데, 선생님께서 어떤 친구의 이름을 대며 소식을 물으셨다. 

 

고등학교 3학년 마지막 학기가 남았던 초겨울의 어느 날, 선생님과 무단결석으로 학교에 나오지 않던 학급 친구의 집을 찾아 나섰다. 바람만 골목길로 따라오던 산동네, 판자 문을 열고 나왔던 그 친구는 무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허물어져 가던 집 밖에서 벌서듯 말없이 서 있던 친구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며칠 후 학교에 나온 친구는 취업반에 들었고, 무사히 졸업했다. 그 친구의 마지막 학기 등록금은 선생님의 “지갑”에서 나왔다는 걸 알게 된 건 졸업할 무렵이었다. 의대를 목표로 공부하던 아들과 우등생 딸과 음악을 전공하던 막내를 둔 선생님의 “지갑”도 그리 풍족하진 않았을 텐데, “채우기보다/꺼내 베풀어야 할 때” 조금도 지체하지 않으셨던 선생님은 교직자로서 나의 삶의 길에 롤 모델(Role model) 이었다.

 

“옆구리 터져 너덜너덜한 지갑/푼돈 몇 푼으로 견딘 허기진 세월/불평불만 한 번 뱉지 않고/

 

묵묵히 동거해온 지가 어언 20여 년”, “지갑을 선물 받을 때/배부른 지갑이 되어달라는 뜻이었겠지만” “아비는 지갑의 신하가 되지 못하고/아비는 지갑을 잘 모시지 못”했기에 가난했던 시인은 “정작” “딸아이”를 위해 마음껏 “지갑”을 열지 못했다고 자책한다. 돈을 주인으로 모시는 대신, 시(詩)를 지고의 가치로 여겼던 시인은 평생 돈으로 “배부른 지갑”을 지닐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쩌다 떠오른 시상(詩想)이 사라질까 재빨리 적어 지갑 속에 넣어둔 종이가 돈 대신 차곡차곡 접혀있던 지갑을 소중하게 품고 다니며, 세속적인 욕망을 채우려 내닫는 가난한 정신들을 위해 기꺼이 정신의 지갑을 열었던 아버지의 높고 외롭고 쓸쓸했던 마음을 자손들은 알고 있었을까. 

 

문화저널21 편집위원 서대선 시인 seodaese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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