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시] 빈잔 / 박몽구

서대선 | 기사입력 2020/08/31 [09:06]

[이 아침의 시] 빈잔 / 박몽구

서대선 | 입력 : 2020/08/31 [09:06]

 

빈 잔

 

너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시간은 기린 목보다 길다

문 밖으로 돌려진 내 마음은 

술이다 벌겋게 타고 있다

 

내가 걷고 있는 길이

돌밭뿐인데도

기꺼이 뿌리 내려

이쁜 꽃이 된 사람아

 

오늘은 왜 이리 늦는지

너를 기다리고 있자면

나는 다 비어서

빈 잔이 된다

채워지기를 기다리며

저물도록 말라가고 있다

 

# 기다려야 한다. 달콤한 커피를 마시고 싶다면, 뜨거운 커피 속 ‘설탕이 녹을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달콤한 커피를 마시고 싶은 욕구가 강해도 설탕이 녹는 시간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커피 속의 설탕이 녹기를 기다리는 동안 당신은 커피에 집중할 것이다. 조그만 티스푼으로 커피 속 설탕을 젓는 손끝에 “돌려진 마음”은 달콤하고 향긋한 커피로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빈 잔”이 되어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기다림은 하나의 주문’과 같아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시간은 밖으로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집중하게 된다. “너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시간은 기린 목보다 길”게 늘어나는 것 이다. 기다리는 시간은 기다리는 사람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에 자기를 들어낸다. 기다리는 사람의 시간은 온통 기다리는 사람의 목 주변에 매달려 분침과 초침이 째깍거린다. “문 밖으로 돌려진 내 마음은” 멀리서 오고 있을 그 사람의 발걸음 소리를 찾아 헤매며 “술”이라도 마신 듯 “벌겋게 타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왜 이리 늦는지” 초조하게 서성거리며, “나는 다 비어서/빈 잔이 된다”. “채워지기를 기다리며/저물도록 말라가고 있”는 괴로운 시간 속에서 얻게 되는 통찰은 자신과 주변 물체들이 지닌 특징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은 “돌밭을” 걷고 있는데, 자신이 그토록 기다리는 사람은 “기꺼이 돌밭에” 뿌리를 내려 “이쁜 꽃이 된 사람”으로 누구와도 대체 불가능한 존재인 것이다. 기다림은 모두 나로 인해 시작되고 나로 인해 마무리된다. 무언가를 기다리게 되면, 자신이 ‘의미에 의지(Will to meaning)’를 지닌 존재로서 의미를 부여한 것을 견디어 내는 사람임을 보여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문화저널21 편집위원 서대선 시인 seodaese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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