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 칼럼] 사실(事實)과 진실(眞實)

강인 | 기사입력 2023/01/16 [09:48]

[강인 칼럼] 사실(事實)과 진실(眞實)

강인 | 입력 : 2023/01/16 [09:48]

간혹 사람들은 〈사실과 진실〉의 차이를 혼동할 때가 있다.

 

‘사실’이란 사람의 의사(意思)에 관계없이 현실에서 눈에 보이는 객관적 사건의 실체를 말한다. 예컨대, 전쟁이 일어났다든가, 홍수가 나서 사람들이 죽었다든가, 누군가가 시험에 합격을 했다고 하는 것은 ‘사실’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다르다. 진실이란 그 사실들 속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본질적인 진리의 실체이다. 그것은 사람들에 의해서 판단된 것이기는 하지만 언제 어느 때이고 변함이 없다. 이를 음악으로 비유하자면 ‘진실’은 ‘테마(Theme)’이고 ‘사실’은 그 ‘테마의 변주(Variation)’에 지나지 않는다.

 

이 ‘사실과 진실’에 관한 논제를 객관적 관념론의 창시자인 ‘플라톤(Platon)’의 철학적 중심사상, 즉 모든 사물의 본질에는 이상적인 형상이 있다는 ‘이데아(Idea)’론(論)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플라톤의 저서 중 [국가론(國家論, Politeia)]이 있는데, 이는 플라톤 자신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s)’가 나눈 대화 형식의 대표적 저술서이다. 이 국가론의 핵심 사상은 ‘정의(Justice)’이며, 필자가 확신하는바 정의의 근원이 바로 ‘진실’이기 때문이다.

 

국가론 제7권에 보면 ‘동굴의 비유’가 나온다.

 

▲ 플라톤의 이데아(Idea) ‘동굴의 비유’ [사진/인터넷에서 발췌]

 

죄수들이 동굴에 갇혀 손과 발이 모두 쇠사슬에 묶인 채 벽을 바라보고 있다. 뒤에는 커다랗게 출입구가 뚫려있고 그 중간에는 환하게 모닥불이 지펴져 있다.

 

죄수들은 벽에 비친 그림자만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저것이 바로 진실일 것이다'

'저것이 바로 우리들의 실체일 것이다'

 

뒤를 돌아보면 안된다고 믿는 상황에서 그들은 그림자라는 ‘사실’을 ‘진실’로 오해해 버린다.

 

이에 플라톤은 뒤에 불빛이라는 진리가 있음에도 그 불빛이 만들어내는 실체의 그림자만 보고있는 인간들에게 깨어나라고 말한다.

 

흔히 사회에서는 사실과 진실의 차이 때문에 많은 비극이 일어나곤 한다.

 

“결혼은 사랑보다 조건이 중요하다”

“정치는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sm)‘이다. 즉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려서는 안된다”

“남들도 다 그러니까.....”라고 여기며 사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는 사실에 불과한 것으로,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실체라고 믿는 것이다.

 

현재 처해있는 대한민국의 실정이 그러하다.

 

그동안 개인을 비롯해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일어난 불의한 사건들이 그러했지만, 특히 정치권은 가장 심각하다. 이는 이미 국민 모두가 알고 있으므로 굳이 이 지면을 통해 일일이 언급하지는 않으려 한다. 그러나 매우 유감스러운 것은 사건마다 ’사실‘은 알겠는데 ’진실‘이 밝혀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 가지만 예를 든다면 ’서해 공무원 피격사건‘의 경우이다.

 

지난 2020년 9월 22일 해양수산부 소속 공무원 이대준 씨가 서해 북방한계선 이북 해안에서 북한군의 총격에 의해 숨진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사건 당시 문재인 정부는 이 씨를 자진 월북자로 판단했으나 현 윤석열 정부의 해경과 국방부는 월북 시도를 입증할만한 증거가 없다며 문재인 정부의 의도적인 월북 조작 혐의로 당시의 담당자들을 수사하고 있다.

 

이 사건에서 이대준 씨가 북한군에 의해 피격되어 사망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씨의 자진 월북 여부를 밝히는 것은 ’진실‘의 문제이다. 이는 개인의 사건이기 보다는 국가안보에 관한 심각한 사안이다. 그런데 2년이 넘도록 이 진실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는 사건 당사자들이 집단 이기주의와 사익을 위하여, 양심보다는 법리의 허점만을 이용해 진상을 은폐하려 하기 때문이다.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

나라 안에 공적(公的), 사적(私的) 의혹으로 가득한 사건의 진실이 규명되어야 한다. 

 

속히 사실과 진실의 그 차이를 깨닫는 방법은 어두운 동굴 속에서 죄수 중 누구라도 뒤를 돌아보고 빛을 발견하는 일이다. 이것만이 모두의 살길이다. 

 

손과 발의 쇠사슬을 끊어야 한다.

허상의 그림자를 제거해야 한다. 아니면 삶을 포기 할 일이다.

 

오늘의 주제가 〈사실과 진실〉이다 보니 과거 1985년 오스카상의 대종을 휩쓸었던 '모차르트(Mozart)'의 음악 전기 영화 [아마데우스(Amadeus)]가 생각난다. '밀로스 포먼(Milos Forman)'이 감독한 미국 영화다.

 

▲ 영화 ‘아마데우스’ 포스터 [사진/인터넷에서 발췌]

 

일설에 의하면 당시 빈(Wien)의 궁정악장이었던 '살리에리(Salieri)'가 모차르트를 시기해 독살시켰다는 풍문이 있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는 얘기다. 이 영화는 아마도 그러한 풍문을 픽션(Fiction)으로 꾸며 영상으로 처리했던 것 같다.

 

노인이 된 살리에리가 이미 몇십 년 전에 죽은 천재 모차르트를 자신이 죽였다고 외치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되는데 결국 목을 찔러 자결을 시도하지만 미수에 그쳐 정신병원으로 옮겨진 다음 신부에게 고해성사 형식으로 고백해 나가는 것이 이 영화의 대체적 줄거리다.

 

전편에 걸쳐 흐르는 그의 교향곡과 진혼곡 그리고 '페르골레지(Pergolesi)'의 미사곡 등 정말이지 음악 영화로써의 진가를 보여준 매우 훌륭한 영화였다.

 

영화는 처음 빛을 열면서 모차르트의 ‘교향곡 제25번 G장조 K.183’의 제1악장과 같은 강렬하고 격정적인 음악의 폭포가 쏟아진다.

 

 

▲Mozart, Symphony No.25 G major K.183 1st Mov. Allegro Con Brio (Leonard Bernstein /Wiener Philharmoniker) 

 

그 이후에 필자는 또 하나의 모차르트 전기 영화를 보았다.

 

그 영화는 독일사람이 관찰하고 독일사람의 손에 의해 제작된 것이었는데 앞서 '아마데우스'와는 관점을 달리 한 것이었다. 즉 미국사람이 만든 영화는 음악성을 중요시하고 모차르트를 좀 더 희화화 한 것에 비해, 독일사람이 만든 영화는 모차르트의 죽음을 둘러싼 모든 의혹을 풀어나가는데 촛점을 맞추었다는 점에서 대조를 이루고 있다.

 

특히 독일영화에서 더욱 진가를 느끼게 된 것은 그 영화의 압권이라 할 수 있는 맨 마지막 장면에서다.

 

염습을 끝낸 모차르트의 시신을 곁에 뉘어 두고 그의 죽음을 규명하기 위해 모여든 아내 콘스탄쩨, 살리에리, 주치의, 궁정 가극장 감독, 남작, 하인 등 여러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그중 이 사건의 수사관 격으로 가장 지체가 높은 백작은 모종의 결단적인 말로서 이 사건을 종결짓고 만다.

 

"우리 시대의 천재 모차르트의 죽음을 둘러싸고 규명되지 않은 많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적어도 여기에 있는 여러분들은 천재 모차르트의 죽음에 조금씩 관여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나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결단에 가깝습니다. 모차르트는 한 손으로 기념비를 세우고 한 손으로는 제 무덤을 파 가면서 자신의 인생을 서서히 무너뜨렸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자신이 앓고있는 병의 독소를 이겨내기 위해 수은을 복용해 왔고 그것이 죽음에 이르는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말할 수 있는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은 단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모차르트, 천재 모차르트를 잊는 것입니다. 영원히....."

 

다음 날 모차르트의 시신은 다른 빈민들의 시신과 함께 묻혀 버리고 만다. 보통사람의 망각 속으로.....

 

모차르트가 죽은 사유에 대해서는 많은 낭설이 있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의 플롯(plot)과 같이 정말 살리에리가 그랬다는 설과 정치결사 조직이었던 '프리메이슨(Freemason)' 단원들이 그랬다는 설, 그리고 성병에 시달리고 있던 그가 수은을 과용한 결과 수은 중독으로 죽었다는 자살설 등 분분하다.

 

그러나 정말 확실한 것은 그가 자신의 생명을 쪼아 먹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을 무렵 자신에게 ‘레퀴엠(Requiem, 진혼곡)’ 작곡을 부탁하기 위해 찾아온 익명의 의뢰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의뢰자를 위한 곡이라기 보다는 모차르트 자신을 위한 곡이었음이 분명하다. 모차르트는 이 레퀴엠을 다 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나머지는 그의 제자가 보충하여 완성했다.

 

여기서 우리는 그때 과연 레퀴엠을 작곡해달라고 찾아온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는 살리에리로 몰아가고 있지만, 가장 유력시되고 있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이웃에 살고 있던 데드마스크(death mask) 제작자였다.

 

당시에 유명한 예술가는 생전에 데드마스크를 만들어놓는 것이 관습이었다. 물론 모차르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데드마스크 제작자는 불경기를 이기기 위해 모차르트에게 데드마스크 제작을 권한 것이 결국 그의 죽음을 재촉한 것이라는 얘기이다.

 

이어지는 곡은 모차르트의 ‘레퀴엠 K.626’ 중에서 그가 마지막 미완성으로 남긴 ‘라크리모사(Lacrimosa)’이다.

 

 

▲Mozart, Requiem Mass in D minor K.626 ‘Lacrimosa’ (Karl Böhm /Sinfónica de Viena)

 

오늘 필자가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은 그 〈사실과 진실〉에 대하여 여러 차례 생각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부디 2023년 계묘년(癸卯年) 새해는 이 나라 안에 산적한 모든 문제의 진실이 밝혀짐으로 민심평정(民心平靜)의 원년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강인

예술평론가, 사단법인 카프코리아 회장

 

※ 외부필진의 기고·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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