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항준 칼럼] ‘참 말모이 사전’ 사회적 알고리즘 필요

박항준 | 기사입력 2019/09/25 [15:55]

[박항준 칼럼] ‘참 말모이 사전’ 사회적 알고리즘 필요

박항준 | 입력 : 2019/09/25 [15:55]

최근 ‘말모이’라는 역사 장르의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일제시대 우리 ‘글’과 ‘말’을 지키려는 숨은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다. 영화 ‘말모이’에서는 국어학자 이극로 선생의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이다.”라는 말씀이 대사로 나온다.       

 

‘말’과 ‘글’이 잘못되면 민족의 정신과 생명이 위험해진다. 식민지 시대는 말과 글을 빼앗기게 되었기에 민족의 정신과 생명이 위험해졌었다. 그러나 식민시대가 아닌 작금의 현실에서도 잘못된 ‘말’과 ‘글’이 우리 민족의 정신과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는 제조업 중심에서 서비스 산업으로 전환하는 산업 변환기에 놓여있으며, 문화적으로는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가 예측했던 대로 새로운 ‘종’의 탄생이 나타나 세대 간 소통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회적으로는 개인들의 텍스트(주장이나 신념)가 강해지고 있는 시기다. 고학력과 네트워크 시대 다양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하게 됨으로써 배우고, 읽고, 판단할 수 있는 수준 높은 국민들이 모인 국가가 되다 보니 자기주장이나 주관이 강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러한 다양성을 인정해야 하는 사회변혁 시기에 우리나라의 ‘말’과 ‘글’이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5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민족은 단어가 매우 풍부한 민족이다. 풍부한 단어는 문학적 가치와 표현의 다양성을 높이는 장점도 있지만 각자 사용하는 말(text)을 멋대로 사용하거나 타인의 말(text)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위험성도 있다. 인간은 원래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경향이 있다. 이와 더불어 풍부한 단어로 인해 텍스트 간 갈등과 텍스트의 오역이 많아지게 된다. 회사에서 장시간 회의 후 작성된 회의록의 내용이 서로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돌아가시다, 갔다, 뒈지다, 요단강 건넜다, 운명하다, 운하다, 명이 다하다, 임종하셨다, 뻗었다.’ 등등 우리는 ‘죽다’라는 표현 하나만으로도 열 개 이상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다양한 표현과 더불어 또 다른 문제는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공식적인 성조(음절을 발음할 경우의 고저 때로는 장단과 강약에 관한 음조(音調)의 형식)는 아니지만 성조와 유사한 표현을 한국도 사용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 사람이 죽었다”라는 말을 전하는 아래 사례를 보면 우리도 다양한 성조 표현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가 죽었어ㅠㅠ(슬픔)

그가 죽었어^~^(기쁨)

그가 죽었어~~(안타까움)

그가 죽었어?(놀람)     

 

결국 ‘죽다’라는 10여 개 이상의 ‘말’과 성조 형태의 표현방식이 합쳐지면 ‘죽다’라는 말이 40~50개 이상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50여 개 이상으로 다양하게 표현되는 상대의  속마음을 다 캐치하기는 쉽지 않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혼돈에 빠진 이유 중 하나다. 50여 개의 표현이 사투리와 가정의 특성, 개인적 언어습관과 결합되면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 값이 나온다. 결국 우리의 다툼은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서로 다른 해석으로 인한 오역으로 상대와 싸우게 되는 것이다. 전화통화, 회의, 대화, 대담, 인터뷰, SMS 등을 통해 한국말로 소통을 하지만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오며 이것이 갈등의 단초가 된다.        

 

이제 ‘참 말모이 사전’을 만들어야 한다. 사회가 소통을 원하고 있는데 소통하는 매개체인 ‘말(text)’이 이를 방해하고 있다. 개개인이 각자의 방언(text)으로 자기주장을 하고, 서로 자신의 생각·철학·상식(text)만이 옳다고 다투기 시작한다. 이를 억지로 강요하고, 밀어붙이다 보니 싸움이 일어나고, 목소리 크면 이긴다는 자조 섞인 말도 나온다. 권위와 권력을 통해 자신의 텍스트를 강제하기도 한다. 상대 텍스트의 숨은 메시지를 읽지 못하는 ‘난독증’ 환자들이 넘쳐 난다. 

 

이제 서로 간에 사용하는 외계어들을 서로 통·번역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알고리즘’이 필요하다. ‘본질’에 대한 동의 과정을 조정하는 콘텍스팅(contexting) 알고리즘이 그것이며, ‘참 말모이 사전’은 사회구성원 간 통·번역을 위한 기초약속이 될 것이다. 제대로 된 단어의 해석은 콘텍스팅 알고리즘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공자는 자로라는 제자가 정치를 한다면 무엇을 먼저 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반드시 명을 바로 잡겠다[必也正名乎(필야정 명호)].”라고 하였고 “정치란 바로잡는 것이다[政者正也(정자정야)].”라고도 하여 정명(正名)의 중요함을 피력하였다.     

 

이극로 선생의 말대로 우리 민족의 정신과 생명은 이제 텍스트(text)에 대한 정명(正名)의 성공여부에 달려 있다. 이를 실천하지 않으면 국론분열과 함께 에리히 프롬이 그의 저서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경고한 대로 자유에 대한 피로감으로 독재를 선호하게 되는 사태가 우리 사회에서 재현될 것이다.  

 

박항준 세한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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